악몽에 대해서

일기

2014. 2. 19. 0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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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이 희미해지는 동안, 나는 아무런 고통도 숨막힘도 없다는 것에 약간 놀라워하고 있었다. 조금 더 약 기운이 퍼져오자 상황이 인식이 됐다. 나는 <고통없이 죽는 약>을 삼키고 죽어가는 중이었다. 이것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잠깐, 이렇게 죽어도 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누군지, 뭐하는 사람인지, 여기가 어디고 내 가족은 누군지... 특히 나는 왜 죽는 약을 먹었는지 모두 떠오르지 않았지만 잠깐, 잠깐, 아니 잠깐만. 멈추고 싶었다. 이렇게 고통없이 죽을 수 있는 건 알았으니까 잠깐만 시간을 줘. 어떻게든 깨어나고 싶어서 몸을 가누려 뭔가를 붙잡고 눈에 힘을 줬지만, 곧 시야가 희미해졌다. 그렇게 벽에 팔과 머리를 부딪고선 바닥에 넘어지는 순간 꿈에서 깼다. 몸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이 아주아주 느릿하고 몽롱하고 길었다.


이런 밤중에는 꿈에서 깨어도 의식을 찾을 수가 없다. 내가 누구지? 여기가 어디지? 아, 사직동... 엄마의 얼굴과 침대의 방향, 집의 구조까지 떠올리고 나야 정신이 든다. 그리고 곧바로 어찌할 수 없는 공포감도 든다. 옷걸이에 겹겹이 얹힌 옷들은 웅크린 불한당이 되고, 포스터의 각종 활자들은 알 수 없는 소리의 영상이 되어 어지럽게 울린다. 이불에서 다리를 내밀고 바닥을 딛자마자 언제 보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공포영화의 장면들이 내 앞에서 펼쳐질까봐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다. 눈을 감아도 끔찍한 이미지들이 선명히 돌아다니고, 정말로 심장이 눌린 것처럼 아픈데 이렇게나 힘든데, 이렇게나 무서운데, 이렇게나... 이불을 꼭 쥐고 끝맺기 힘든 말들을 절박하게 내지른 것 같지만 그것마저 꿈인지, 공포에 질린 머리 속 사정인지 알 수 없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면 아무렇지 않은 아침이다.


친구가 죽었고, 남자친구가 죽는 순간의 고통에 대해 말했고, 인터넷 어디선가 고통없이 죽는 약에 대한 페이지를 본 게 그냥 한데 뒤섞인 것 일테다. 날이 밝으면 또 괜찮다. 괜찮아, 괜찮은 것 같아, 괜찮은데, 괜찮네? 읊조림 한 번이 알약 하나인양 손바닥에 모아담아 꿀꺽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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