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for rent

일기

2015. 3. 28. 21:33

 내가 겪고있는 것이 무엇이건 간에, 생활을 어렵게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수업, 근무, 과제, 운동 등의 일과를 끝내고 나면 항상 길 잃은 기분으로 멍하니 주저앉게 된다. 내 앞에 놓인 시간이 너무나 짐스럽다. 생산적으로 프로젝트를 정리해 논문을 쓰거나, 아니면 활력을 주는 무언가(영화보기? 사진찍기?)라도 해야한다는 생각이 전광판처럼 번쩍이지만 꾸물거림, 알수없는 초조함, 막막함이 노숙자처럼 대책없이 여기저기 널부러져있고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이제는 일어서야지 같은 다짐이 그 옆을 야속하게 지나칠 뿐이다.


 삼주째 먹고있는 부프로피온이라는 약은 엉뚱하게 갈증을 주고 식욕을 가져갔다. 덜 먹고, 가볍게 먹고, 물을 벌컥벌컥 마시니 자연히 살이 빠졌다. 몸도 가볍지만 머리도 가볍다. 술에 취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다. 별다른 생각도 욕구도 없다.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니 이 약은 과다복용해도 죽을 확률이 매우 적다고 했다. 나는 너처럼 물없이 약을 꿀꺽 삼키는 연습을 하고있다. 맨 입에 약을 털어넣고 고개를 젖히던 모습이 왠지 눈에 선하다.

 어제는 교보문고에 들러 책을 잔뜩 샀다. 광화문을 걷던중에 간단히 정신을 수술 할 순 없는걸까 언뜻 생각하다 이렇게까지 기운없는 내 마음이 딱해서 눈물이 났다. 그래서 그냥 화장실에 들르려던건데, 한병철의 책들이 매대에 누워있는걸 보니 발걸음이 안떨어졌다. 마치 렌즈 때문에 인공눈물을 뿌린 것처럼 보이려 고개를 흔들고 태연한 표정으로 책 두권을 집었다. 사실 문지책은 신간을 항상 받아보는데도 그냥, 매대 앞에서 책을 펼쳐보며 너의 모습을 찾고있는 이 시간을 갖고싶었다. 그러고도 여기저기 책장 사이를 배회하다 서너권 정도를 더 샀다.

 오늘 버스 정류장에서 본 포스터 속에서는 어떤 스님이 사람좋은 표정으로 웃고있었다. 길가에 핀 풀처럼 살으라고,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깨닫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라는 문구를 읽으니 그 표정이 어쩐지 웃음같지가 않았다. 지도교수는 더 나아가 삶이든 '나'이든 죽음이든 모두 무상한 관념일 뿐임을 받아들이라 했다. 무아지경... 이미 상식, 합리, 기껏해야 감각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서양인의 관점에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정말이지 하루가 이렇게 길 필요는 없다. 시간에서 벗어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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