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미

일기

2015. 3. 30. 09:14

 유학박람회에서 간단한 통역알바를 맡아서 주말을 쉽게 보낼 수 있었다. 학생의 나이가 얼마나 됐건 주로 말을 하는 쪽은 학부모였는데 그 많은 사람들의 질문은 정말로 한결같았다. 비자나 수속, 비용, 법정대리인과 같은 각종 절차적인 질문을 제외하고 나면 희망하는 지역마저도 한두군데로 한정되어 있었다. 첫날 두시간쯤 보내고나니 통역할 필요도 없이 그냥 이제껏 취합한 정보로 내가 대답을 해줄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시간을 소비할 수 있는 이 기회가 마냥 고마웠으므로 엇비슷한 질문들은 물론, 푸념을 가장한 은근한 자식자랑까지도 열심히 들어주었다.
 
 모두 엇비슷한 인적사항으로 출발해 같은 질문을 거쳐 같은 결론에 이르는데 본인들은 나름의 이유와 필요를 고유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우리 애는 하필 이래서, 우리 애는 특이하게도 이렇기 때문에... 그렇지만 내게는 (그리고 교육청 직원에게도) 컨벤션 센터로 떠밀려 들어오는 몰개성 덩어리일 뿐이었다. 열심인 엄마때문인지, 속사포처럼 말을 뱉어내는 외국인 때문인지 위축되어 한마디 말도 꺼내지 못하는. 나는 입구를 쳐다보며 큰 솥에서 쏟아져 나오는 무거운 액체를 떠올렸다. 모두 몰개성안에서 녹아내려 누가 누군지 구분할 수도 없이 액체가 되어버린 학생들.

 집으로 가는 길, 강남의 붐비는 대로를 걷는데 나 또한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어떤 덩어리의 한 부분이라고 느꼈다. 나라고 내가 남들과는 다른, 고유한 무언가를 가졌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나도 나 아닌 사람에겐 그냥 20대 여자 소비자이고, 인문계 석사생이고, 막 연인을 잃은 젊은이일 것이었다. 내가 가진 지식은 애초에 남에게서 온 것이고, 나의 취향이라는 것도 남에게는 없는 것이 아니며, 나의 언어나 나의 우울한 기질도 이 거대한 세상과 유구한 시간 속에서 이미 수도없이 있어왔을 것이 분명하다. 이 끝없는 돌림노래, 메아리 속에서 누가 자신의 목소리를 콕 집어낼 수 있을까?

 무엇이 됐든ㅡ 누구나, 모든 것이, 본래적으로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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