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일기

일기

2015. 8. 14. 07:49



커다란 여행가방을 끌고다니는건 피곤한 일이었지만 내 손으로 옮길 수 있는 이 가방만큼의 짐이 내 삶의 무게처럼 느껴져서 한편으론 홀가분하기도 했다. 생활의 온갖 군더더기를 다 덜어내어 마치 집안 대청소를 했다거나, 살을 쪽 뺀 것처럼 가벼운 느낌. 이정도는 번쩍 들어서 어디든 갈 수 있으니까. 


 두달간 살 곳은 낡고 더럽지만 꽤 널찍하고, 낡아서 예쁜 분위기가 있다. 복층구조라 천장도 높고 빨래가 금방 마를만큼 빛도 잘 든다. 침대와 옷장이 있는 윗층에서 내려오면 퍼져 누울 수 있는 자리가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하루를 부지런히 보내게 된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작은 부엌이 있는 것도 독특하고 마음에 든다. 매일 아침 창가에 앉아 인스턴트 커피를 타마시며 나중에는 집을 이렇게 만들어 살면 좋겠다ㅡ 라고 꿈꾸지만 미래의 기대소득과 현실적인 생활수준을 생각하니 우울해졌다. 학과를 찾기도 힘든 이런 공부를 해서 정말 돈을 벌 수 있을까.


 최근 몇년간 가장 규칙적이고 건강한 생활을 하고있다. 매일 여덟시간을 자고 십키로를 걷고, 천오백미리리터의 물을 마신다. 한나절 일을 하고, 세끼 밥을 챙겨먹고 앞뒤로 집안을 조금씩 치우다보면 하루가 금방 지난다. 수정고도 잘 마무리가 됐고, 새 연구의 데이터도 조금씩 모여 진척이 생기고 있다. 요일 개념 없이 매일 똑같은 날들을 보내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외부자극과 스트레스도 매일 생기지만 어쨌든, 염주를 세듯 매일 정해놓은 일상을 순서대로 밟아나가는 것을 통해 몸도 정신도 맑고 조용히 가꾸려 노력중이다. 


 사실 어디에서든 할 수 있는 생활을 머나먼 타국에서 하고 있다. 그래도 온종일 고요히 보내면 해가 지기 전에는 매일 한두시간쯤 걷는다. 관광객 사이를 비집고 퐁피두, 샤틀레를 지나 센강을 보고 오기도 하고 건들거리는 동네 한량들로 허름한 풍경의 동역 근처와 꽤 운치있는 생 마르탱 운하를 걷기도 하는데ㅡ 소리를 잔뜩 키운 이어폰을 방패 삼아 빠르게 걷는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긴 쉽지 않다. 도시를 걷는게 좋은 이유는 내가 사람들 사이로 스며드는, 존재감이 없이 투명해지는 느낌 때문인데 여기에서는 오히려 이목을 끌게된다. 낯선 사람들의 되도 않는 수작이나 희롱이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우울함으로 차곡차곡 쌓여 매일 대문을 열고 나서길 주저하게 만든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도 부조리도 너무 많다.


 일상에서 나를 떼내어 먼 곳에 고립시켜 놓았는데도, 마음을 조용하게 돌보는게 쉽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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