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랍스터

후기

2015. 11. 10. 00:39



 이제껏 봐온 디스토피아에 관한 영화 중 가장 참신했지만 몇몇 장면은 필요 이상으로 잔인해서 눈과 귀를 막고 봤다. 영화 전면에 '커플'이 부각되어 있지만 사실 개인의 자유와 개성이 극도로 통제되는 사회와 그에 반反하는데 이상하게 똑같이 폭력적인 집단의 대립, 그러니까 어느 사회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부조리의 원형에 관한 이야기였다. 인간성이 얼마나 기발하게 짓밟힐 수 있는지 양 극단을 통해 코믹하게 보여주는 것이 이 영화의 특징이다.


 필요에 의해 짝을 짓는 사람들. 사람들은 사회에서 추방당하지 않기 위해, 동물로 변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커플을 이루려 한다. 그리고 이 체제에 반대하며 숲에서 숨어지내는 외톨이 집단은 추파를 주고받았다는 이유로 남녀의 입술을 잘라버릴 만큼 잔인하게 사람 간의 결합을 금지한다. 호텔은 도시와 숲의 중간에 있는, 마지막 선택의 공간이다. 주어진 시간 내에 짝을 지어 도시로 돌아가거나, 실패해 동물이 되거나. 아니면 이 선택을 거부하고 숲으로 도망쳐 외톨이로 살거나. 이 호텔에서는 성욕을 자극해 그것을 이유로라도 이성을 찾게끔 유도하고, 커플성사에 실패했을 경우의 상황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공포감을 주입해 어떻게든 사람들을 짝지으려 한다. 이런 와중에 알 수 없이 서로에게 끌리고, 노래를 나눠 듣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스킨십을 하고, 상대방과 함께하기 위해 자신의 눈을 찌를 계획을 세우기도 하는 주인공 커플만큼은 그나마 진짜 사랑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애초에 남주인공이 짝을 찾지 못할 경우 변할 동물로 랍스터를 선택한 이유 가운데는 오래 살 수 있기 때문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또 커플이 되기 위해 친구를 배신한 이유도, 자신이 초래한 사람의 죽음을 눈앞에서 빈정거릴 정도로 냉혹한 모습을 꾸며내 오랫동안 유지한 이유도 체제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였다는걸 돌이켜 본다면 의심할 여지가 충분하다. 내게는 주인공 커플이 이성적인 호감을 나눈 정도일 뿐인데 이 시스템 내에서 지위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상대방과의 결합에 매달린 것처럼 보인다. 상대방과의 사랑의 증표는 사냥한 토끼이고, 사랑의 근거는 둘 다 근시를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인 것으로 나온다. 사랑(혹은 결합)을 확인하고 유지하기 위해 물리적 것들(토끼, 근시)에 집착하는 모습이 계속 부각되는데, 거기에 '그냥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들으면 안 되느냐'는 여자에게 각각의 CD 플레이어를 완벽하게 동시에 눌러야만 한다는 주인공, 결국 적막한 화면에서 각각 이어폰을 꽂고 춤을 추는 커플의 딱한 모습까지 더해본다면 이것이 정말 사랑이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여자가 시력을 잃었을 때, 스스로 눈을 멀게 하려는 주인공의 결심마저도 사실은 안정적인 사회에 편입하기 위한 방편이기 때문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근시라는 공통적 속성을 잃은 직후에는 분명 꽤 냉담한 태도를 보이다 혈액형이 뭐냐, 독일어를 할 줄 아냐는둥 어떻게든 공통점을 찾아내려 방황하기했기 때문이다. (이 부분, 특히 나무 아래 앉아 물건 맞추기 놀이를 하는 부분은 자막이 미친 오역이다. 거리 두는 태도를 다정한 말들로 번역해놨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우물 모양만큼의 하늘만 보이는 것처럼, 주인공 커플의 사랑과 선택은 괴상한 체제 내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능한 최선'이었을 수 있다. 커플이 되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 주인공 커플의 관계를 어느 정도 설명한다 한들 그 또한 완전무결한 인간이 아닌 이상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세상이 불합리하게 돌아갈 때,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구축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의 의식이나 능력 안에서 가능하질 않으니까. 그러니 그건 그렇다 하더라도 정말 이상했던 건, 모두 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고, 모두 같은 개수와 품목의 물품만을 지닐 수 있고, 기성의 사이즈와 분류에 자신을 욱여넣어야만 하는 커플 호텔에서 투숙객들은 타인과 자기 자신을 모두 굉장히 물리적인 특징으로 정의한다는 것이었다. 외적인 것들이 모두 표준적으로 통제되는 상황에서는 그런 만큼 내적인 특성과 성격이 주목되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등장인물들은 둘 다 코피를 자주 흘린다거나 절름발이라는 것처럼 굉장히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포인트 하나를 운명으로, 결합의 근거로 여긴다. 보통의 사람들은 사회의 체제와 규칙에 순응한다고 해도, 영화의 주인공쯤이 되면 조금은 다른 모습을 보여줄 줄 알았는데, 아주 약간이라도 영웅적인 면모가 있어야 할 것 같았는데, 딱히 서로의 고유한 개성이나 내적인 성향, 영혼의 모양 같은 것을 알아봐 주는 장면을 찾을 수가 없었다. 주인공 커플만의 언어를 만들어내긴 하지만 그건 그저 또 다른 하나의 폐쇄적인 세계일 뿐이고, 그들의 선택은 서로의 성장을 도모하기는커녕 그 반대로, 정반대로 흘러간다. 


 영화 속 세계의 답답하고 우울한 모습은 극도로 과장되어있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지금 이 사회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일단 대부분의 결혼이 경제적 배경과 외모, 교육수준 등등의 조건이 맞아야 마찰 없이 성사된다. 결혼뿐 아니라 연애도 그냥 제도처럼 되어가고 있는 것을, 사람들이 실제적인 필요나 이익을 따져가며 사람을 사귀는 모습을 매일 목격한다. 왜 연애를 하냐는 질문은 받기 힘들지만, 연애를 하지 않으면 왜? 라는 질문이 따라다니고, 연애의 당위성에 대한 서사는 어딜가도 피할 수가 없이, 이 도시의 가로수만큼이나 빼곡히 들어차 있다. 하물며 결혼을 하지 않겠다 선언한다면 짝을 짓지 않겠다는 그 사실 하나로, 혼자 살겠다는 그 생각 하나가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할 때 꼭 등장하는 소개말이 된다. 독신(남)녀, 노처녀, 노총각...이 그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큰 부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해 짝을 지어야 한다는 목소리는 사회 전반에 떠다니는데, 아무도 이게 누가 낸 목소리인지, 왜 짝을 지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용감하게 단언을 해보자면 지금, 내가 사는 여기는 사랑의 이유에 대한 모범 답안이 그냥, 너라서인ㅡ 이성에 대한 끌림 이상으로는 사랑에 대한 사고가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다. (쓰는중)


 한병철: 에바 일루즈는 연구서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에서 오늘날 사랑이 "여성화"되고 있다고 확언한다. "상냥한" "친밀한" "조용한" "편안한" "달콤한" "부드러운"처럼 낭만적 사랑 장면의 묘사에서 사용되는 형용사들은 전부 다 "여성적"이다. 남자든 여자든 여성적 감정의 영역으로 몰아넣는 낭만주의의 이미지가 세상에 가득하다. 그러나 그녀의 진단과 달리 오늘날 사랑이 단순히 "여성화"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모든 삶의 영역이 긍정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가운데 사랑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과잉이나 광기에 빠지지 않은 채 즐길 수 있는 소비의 공식에 따라 길들여진다. 모든 부정성, 모든 부정의 감정은 회피된다. 고통과 열정은 안락한 감정과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흥분에 자리를 내준다. 속성 섹스의 시대, 즉흥적 섹스, 긴장 해소를 위한 섹스가 가능한 시대에는 성애 역시 모든 부정성을 상실한다. 부정성의 완전한 부재로 인해 오늘날 사랑은 소비와 쾌락주의적 전략의 대상으로 쪼그라든다. 타자를 향한 갈망은 동일자의 안락함으로 대체된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동일자의 편안한 내재성, 편하게 늘어져 있는 내재성이다. 오늘날의 사랑에는 어떤 초월성도, 어떤 위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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