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하다가

일기

2015. 12. 13. 02:52

  내가 이렇게 욕심이 많은지는 아마 아무도 모를 거다. 항상 허겁지겁 뛰어들어오는, 늦지나 않으면 다행인 덜렁이 이미지인데 나는 사실 뭐든지 잘하고 싶고 칭찬받고 싶다. 설거지를 하면 뽀득한 식기를 줄 맞춰 세워놓고 싶고, 공문 하나를 써도 군더더기 없이 내 맘에 딱 맞는 문장을 쓰고 싶다. 온전히 나를 위한 행동들은 아니고 어느 정도 남의 인정을 기대하고 하는 건데 사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걸 알고있다. 아무도 남에게 이렇게까지 관심을 쏟지는 않으니 뭐, 그런 칭찬 같은 건 기대하지 않는다. 근데도 사소한 것들에 계속 신경 쓰게 된다. 줄 세우고 정리하고 통일하고 다듬고... 이 말이 안 맞는 상황이 뭔진 모르겠지만 이럴 땐 내가 남같이 느껴진다. 내가 남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게 될 때?


 욕심은 욕심인데 여기에 소심이 더해져서ㅡ 이게 항상 피드백이 이뤄지는 연구로 넘어오면 뭐 하나 제출할 때, 보고할 때마다 시도 때도 없이 잔뜩 기대에 부풀어 둥둥 떠올랐다가 낮은 평가, 혹은 무성의한 답변이 나오면 추락하게 된다. 띠걱띠걱 천천히 올라가다 예고 없이 뚝 떨어지는 롤러코스터처럼. 고작 석사생이 몇 시간(남짓) 생각해서 또 하나의 자료 해석 가능성, 방향, 아이디어를 제시했을 뿐인데 피드백을 기다리는 동안 칭찬이 마치 당연히 눈앞에 있는 것 마냥, 욕심이 가요 프로그램 1위 후보만큼이나 부푸는 거다.


 교수는 바쁘다. 바빠서 학생의 연구에 대해 샅샅이 파악할 여유나 생각해볼 시간이 없다. 공동연구는 이를테면 교수랑 같이 김밥을 만드는 거랑 비슷하다. 대충 '야채 김밥을 한번 만들어보지'하는 식으로 주제가 주어지면 밥 한 번 지어본 적 없는 학생이 속 재료를 준비하고, 교수는 홀끗 보고 들어갈 것들을 골라주는 식이다. 맛있고 신박한 김밥을 만들려면 새로운 재료를 적절히 섞어야 할 텐데 김밥을 잘 모르는 학생의 입장에서는 좋아 보이는 재료는 일단 다 구해서 손질해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 일은 학생이 하고 판단, 결정을 교수가 하는 식이라 엉뚱한 재료를 내놓는 걸 무서워하면 안 되는데, 많이 생각해서 아이디어, 분석, 해석을 많이 내놓을수록 배우는 건데 소심한 나는 선택받지 못한 그 아이디어들이 너무너무 창피하다. 아직도.

 

 오늘은 간단히, 피험자들에게 나눠줄 사후설명서를 써서 확인을 받으려 보냈는데 칭찬에 대한 기대는 접어두더라도 무난히 통과는 할 줄 알았던 것에 "politely, you are absolutely crazy for writing so much - what you wrote is only interpretable to linguists!"라는 답을 받았다. 뭐든 평가는 내가 만들어낸 아이디어, 서류에 관한 것이지 나라는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2년 동안 되새김질해왔지만 아직도 엉뚱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창피해서 마음이 쿵덕쿵덕 한다. 게다가 연구는 경험이 쌓인다고 딱히 쉬워지지도 않는 것이 교수마다 절차와 스타일이 다르다. 그리고 연구가 쌓일수록 비전문가가 이해하게끔 기술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래도 한두 시간 지나면 괜찮아진다. 코앞에 일이 잔뜩 쌓여있어서 이런 감정에 휩쓸릴 시간이 없다. 그냥 집에 들어올 때쯤 잠깐 '뭐지 이 병신은...' 뭐 그런 기분. 병신같긴 한데 좀 귀여운 것도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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