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가식

일기

2015. 12. 16. 22:24

 오 년 만에 귀국한 친구를 보러 시내 번화가에 나왔는데 시간이 좀 남아서, 궁금했던 화장품을 구경하러 백화점에 들렀다. 콕 집어 두 가지 제품을 보려던 건데... Dolce Vita는 내 얼굴빛에 안 어울렸고 Charade는 몇 달째 품절이라 구경도 어렵다고 했다. 그러니까 가식은 살 수가 없었고 달콤한 인생은 내게 어울리질 않았다. ㅎㅎ. 그래도 굴하지 않고 Audacious 라인의 립스틱을 샀다. 점원은 대담한 립스틱을 입술의 안쪽에만 조심조심 풀어가며 발라주었다.


 이 휘황찬란하면서도 시장통 같은 백화점이 답답해서 서둘러 쇼핑을 마쳤다. 나오는 길에 친구에게 선물하려고 (몇 주만에 재고가 들어왔다는) gypsy를 같이 계산했다. 화장품의 색상 명은 회사가 팔고 싶은 어떤 이미지를 반영하는 것일 텐데, 꼭 말장난이 아니어도 대리석과 샹들리에가 들어찬 고급 상점에서 사람들이 집시 여인의 입술 빛깔을 따라 하려고 돈을 쓰는 이 상황이 재미있었다. 물론 나도 이 재미있는 부조화를 구성하는 어엿한 일원이다. 내 환상 속의 유대이지만, 게다가 별로 고상하지 않은 집단이지만 어딘가에 속한다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잘 놀고, 공부도 하고 새벽 늦게 집에 들어오는 길, 백화점에서 들었던 외국어 단어들이 제멋대로 뒤섞이다 '달콤한 가식과 대담한 집시의 인생'이라는 문구가 됐다. 오늘 본 택시 아저씨가 사람이 공부를 너무 하면 이상해진댔는데 맞는 말인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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