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일기

일기

2015. 12. 26. 04:14



 오늘은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


 책을 읽다 보면 이 생각 저 생각 딴생각이 떠올라서 잘 안 읽힐 때가 있다. 책을 아예 덮자니 정확하게 내가 뭘 생각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고, 페이지는 넘어가질 않고. 하나 확실한 건 읽는 양이 많아질수록 나는 입을 다물어야겠다는 거다. 세상에는 이미 온갖 것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 중 말해지지 않은 것은 단 한 개도 없다.


 분석가는 내가 항상 도피하는 게, 무엇도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 덮어버리는 게 제일 먼저 다뤄야 할 문제라고 했다. 아 정말 성가시다.


 요새는 하루에 몇 마디 하기가 어렵다. 편의점에서 물을 살 때 감사합니다 한 마디,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제일 작은 거요(샷 추가해주세요) 할 때 한 마디. 계획한 대로 논문의 진척이 나와주질 않아서, 사람을 만날 여유가 없다.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다. 소통에 대한 갈증도 기대도 사라졌다. 이렇게 말하면서 사실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는 건, 오히려 언제라도 누군가 나타나기만 하면 곧바로 날 내던질 태세라는 거다. 그런 내가 싫어서, 모두에게 거리를 두고 있다. 드라마나 영화에선 항상 외적인 이유 없이 사람들로부터 도망치는 인물이 나온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고는, 끝까지 따라가 왜 사랑받기를 두려워하냐며 큰소리를 치고. 한두 해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루어지지 않는 내 소원의 방향을 바꿔서, 내가 그런 구원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물론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한 일이다. 나는 오랫동안 Open Book이라는 노래를 그렇게 좋아했다.


 예전에 쓰던 일기 앱을 열어봤는데, 이전 남친들의 이야기를 읽다 하나같이 진짜 별로인 일화때문에 오밤중에 화가 다 났다. 왜 이미 지나간 일에 연연하는지, 헤어진 연인을 미워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무슨 맥락인지 순간 아주 잘 느껴졌다. 이 뜬금없는 화는 뒤돌아서니 또 금방 사그라들었는데, 이게 자존감이 높은 자아상을 만들어 놓고 내가 그 뒤로 숨는 걸까, 하고 헷갈렸다. 상처에 대한 감정을 억누르는 건가 하고. 그런데 내가 정말 상처받지 않은 것일 수도 있지 않나, 싶기도 하고. 그 사람들과는 애초에 그렇게 가깝지 않았고, 내 모습을 편하게 드러내지도 못했었다. 상처를 받을 것도 없지 않나. 안그래도 알랭 드 보통은 ‘Intimacy is the capacity to be rather weird with someone, and finding that it’s okay with them.’ 이라고 했다. 근데 또 그냥 남에 대해 분노하기 보다는 나의 상처에 대해 생각하는,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성향때문인 게 제일 맞는 것 같다. 그러니까 아무도 나보다 중요하지가 않은 거다. 아, 눈먼 백치일 때 세상은 정말 단순하고 편안했는데.


 음 또 오늘 틀어본 드라마에선 어떤 여자가 Don’t you dare judge me!라고 말했다. 왜? 상대방의 행동에 대해 나름의 해석을 저장하는 건 자연스러운 행동 아닌가… 그것보다 먼저 내가 남의 머릿속 사정을 간섭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생각엔 일상생활에서의 의사소통도 번역의 한 양상이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당신의 말을 나름대로 해석해서, 해석한 만큼만 받아들이기 마련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똑같은 말도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는 데에 차이가 있고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같은 집단 내에서도 어떤 사람 X에 대한 평가가 제각각 다른 경우가 많은 것 아닌가(어? 나는 X는 오히려 ~한 것 같던데 같은). 사람에 관한 판단을 내리는 게 나쁜 일이라면, 나는 정말 악당 중의 악당이다.


 그런데 또 저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동사 하나에 엄청난 무게가 있는 것처럼, 조금만 일찍 그 말이 나와도 기겁을 했다. 정말 여러모로 순진한 건가… 아니면 저 사회의 사람들은 말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 정말 윤리적 책임을 느끼나 싶었다. 저런 장면을 틀어주고 발화의 언표내적인 힘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면 아무 생각 없이 점수에 맞춰 어문학과에 들어온 어중이떠중이까지 집중할 수 있는 수업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난여름, 어떤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사람을 알게 되어서 그 가게가 문을 닫은 시간에 몰래 기어들어가 밤새 술을 마신 적이 있다. 술꾼끼리 통했던 이야기 중 하나는, 빨간 포도주가 싫다는 건데 그 이유는 이, 입술에 착색되기 때문이다. 매시간 양치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양껏 마시는 사람들에게는 깔끔하지가 않다. 이 이야기가 왜 나왔냐면… 그냥, 사람과 드라마가 그리워서. 외국어로 하는 실없는 이야기와 하얀 포도주 세 병으로 밤을 새웠던 것을 되새기고 싶어서. 우리는 소통할 수 없고, 공감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는 것에 좌절하면서도 사람을 가리지 않던, 입을 다물기 전의 내가 그립다.


 나는 정말 이렇게 혼자 가는 길을 버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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