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펼쳐진 들

일기

2016. 1. 13. 02:38

 새로 산 책에서 “사물과 사건 들이”라는 대목을 읽다가 띄어쓰기가 잘못됐나, 싶어 네이버 사전을 찾아봤다. 띄어쓰기를 워낙 못해서 몰랐는지, 아무튼 신기한 걸 발견했다. ‘들'은 2가지로 표제어가 나누어져 있었다.


1. -들: 그 문장의 주어가 복수임을 나타내는 보조사. 앞말에 붙여 쓴다.

2. 들: 두 개 이상의 사물을 나열할 때, 그 열거한 사물 모두를 가리키거나 그 밖에 같은 종류의 사물이 더 있음을 나타내는 의존명사. 앞말과 띄어 쓴다.


 그러니까 의존명사의 경우에 또 두 가지 용법이 있는 거다. 예를 들어 “사물과 사건 들이”에서의 들은 '사물과 사건’을 묶어서 통째로 지칭하는 것일 수도, ‘사물들과 사건들’처럼 나열된 단어에 모두 복수의 의미를 더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


 그런데 앞말과 붙여 쓰는 보조사 -들을 놓고 보면, ‘학생들’, ‘다들’과 같이 전형적인 용법에서 나아가 ‘식사들 하셨어요?’ ‘식사 하셨어요들?’로 성격이 달라 보이는 표현들이 떠오른다. 국립국어원에서 찾아보니, 뜻풀이는 같지만 여기서는 ‘들’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었다. 뜻풀이는 토씨까지 같고, 붙여 쓰는 -들을 두 가지 하위항목으로 나눈 것이 다르다.


1. -들: 셀 수 있는 명사나 대명사 뒤에 붙어 복수의 의미를 나타내는 접미사

2. -들: 체언, 부사어, 연결 어미 ‘-아, 게, 지, 고’, 합성 동사의 선행요소, 문장의 끝 따위에 붙어 그 문장의 주어가 복수임을 나타내는 보조사

3. 들: 명사 뒤에 쓰여 두 개 이상의 사물을 나열할 때, 그 열거한 사물 모두를 가리키거나 그 밖에 같은 종류의 사물이 더 있음을 나타내는 의존명사.


 맞춤법 규정에서 찾은 내용은 아니고, 인터넷 게시판의 답변에서 본 것인데 아무튼 게시글의 질문은 보조사 -들을 붙일 수 있는 곳에 규칙이 있는지, 아무 데나 붙일 수 있는 지였고 게시판지기는 비슷한 문의글들에 앵무새같이 사전적 풀이만을 답변으로 달고 있었다. 그런데 -들의 신비로움은 아래의 예문에서 알아볼 수 있다.


 배고프니까들 빨리 식사하고 합시다.

 배고프니까 빨리들 식사하고 합시다.

 배고프니까 빨리 식사들하고 합시다.

 배고프니까 빨리 식사하고들 합시다.

 배고프니까 빨리 식사하고 합시다들.


 우리말 활용에 대해서 속 시원히 답해주지 않는 건 아르바이트생이 답안지만 받아놓고 게시판을 관리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학교문법과 통사, 그리고 국어학에 문외한이라 섣부르게 말하면 안 되지만) 규범적인 정리가 안 되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특히나 -들의 두 번째 풀이를 보면, (생략된) 주어가 복수임을 나타낸다는 설명은 명쾌하지만 체언, 부사어, 연결 어미 네 종, 합성 동사의 선행요소, 문장의 끝 따위에 붙는다는 게 뭔가 싶다. 이게 다 무슨 말이고 저기에 포함되지 않는 건 무어란 말인가… 개인적인 공간인만큼 책임감을 덜어놓고 말하자면, 저런 길고 복잡한 설명은 이론적으로 정리가 덜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 같다.


 그래서 관련 논문이 있는지 재미로 대충 찾아봤다. 일단 ‘들’을 부각한 연구 자체가 많지 않았고 (학위논문과 소논문을 합쳐 10~20건 정도?), 모두 2000년도 이후에 이루어진 것을 보니 블루오션인 것 같았다. 너무 대충 찾은 건가… 일단 보조사 -들이 붙을 수 없는 단어는 일부 case marker(예: -이/가 혹은 -을/를)인 것, 그리고 -들이 수식하는 것은 문장 성분의 문법적 의미보다 언어에 담긴 상황(참가자)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의존명사, 접미사, 보조사로의 문법적 범주화가 타당하지 않다는 주장도 훑을 수 있었다 (개별 낱말을 어떻게 범주화할 것인가 하는 문법의 문제에는 예전부터 흥미가 있었지만, 아쉽게도 지금의 나와는 거리가 좀 멀다. 그런데 사실 보조사 범주 자체에 대한 의심도 있다. 국어학에서는 모르지만 불어학에서는 particle, 소사小辭는 비교적 늦게 만들어진 말로, 기존 범주로 규정할 수 없는 곤란한 것들을 모두 잡아넣는 '쓰레기통'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말에서 보조사로 분류된 것들에 어떤 보편적, 공통적 속성이 있나도 공부삼아 찾아보고 싶다. 아... 졸업논문만 마치면.) 비교적 최신의, 유행하는 방법론을 쓴 연구로는 코퍼스를 통해 결합양상을 검토한 연구가 있었다.


 여기서, 나는 연구 주제가 될만한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피어나기 시작했는데 일단은 위의 신비한 예문에서처럼 -들이 다양하게 쓰였을 때, 문장 내에서의 위치나 결합한 성분에 따라 사람들이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정도의 차이가 있는지 궁금했다. 또 한 신문기사에서는 흥미롭게도 ‘너희’와 ‘너희들’의 차이가 뭉뚱그림과 개별성에 있다고 주장했다. ‘너희들’은 너희라는 청자 집단내의 개개인을 부각하는 뉘앙스가 있다는 것이다. 규범문법에서 정리된 것은 -들에 문법적 의미인 복수plural가 있다는 것과 경우에 따른 띄어쓰기까지이고, 국어학에서는… 어디까지 되어있는지 잘 모르겠다(그런데 의문문이나 명령문의 끝에 -들이 쓰이는 경우 과연 붙여쓰는 게 자연스러운가 하는 의문도 든다. 식사는 하셨어요... 들? 혹은 먼저 식사 좀 하세요, 들!과 같은 경우 구어에서는 '들'이 쓰이기 전에 말에 잠시 공백이 있어도 어색하지 않은데 그렇다면 보조사 -들의 독립적 위상을 인정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얼핏 든다). 그치만 이런 다른 상황 의미가 있는지 상세히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복수’를 나타내는 것이 가장 많이 쓰이는 의미이겠지만, 이 외의 다른 부차적인 의미가 있다면 외국인들이 그것들을 어떤 순서로 습득하는지를 통해 그 전형성을 비교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ㅡ 찾아보니 이건 굉장히 비슷한 연구(2013, 딱 하나!)가 있다. 아쉬워라ㅠㅠ.


 또 우리말에서는 복수표지 -들이 필수적이지 않은 것도 어떤 생각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쪽의 책들과 저쪽의 책들은’은 어색한 말이 아니긴 하지만 ‘이쪽의 책과 저쪽의 책은’으로 복수표지를 생략해도 복수의 의미를 담을 수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콕 집어 복수의미를 강조해야 할 것이 아닌 경우 -들을 붙이지 않는 게 자연스럽기까지 한데, 그건 예를 들어 '이런 자잘한 생각들이 계속 들었다’ < ‘이런 자잘한 생각이 계속 들었다’와 같은 경우이다. 역시나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번역을 ‘배울’ 때 외국어의 -s 붙은 단어를 기계적으로 -들로 옮기지 말라는 팁도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명사에 수number 정보의 표시가 필수적인 영,불어 화자들과 복수표지 생략이 (아마도) 더 많은 우리말 화자들의 대상 인식에는 차이가 있을지가 궁금해졌다. 인식의 차이라는 거대한 주제는 소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한국인이 영어를 배우는 (초기) 과정에서 복수표지 -s를 생략하는 경향(negative L1 transfer) 같은 것을 살펴볼 수 있을지 정도는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근데 이건 또 너무 단순하고... ㅡ 단순히 error analysis의 한 부분으로 다뤄진 것 말고, 복수표지가 단독 주제인 경우로는 중국인 학습자의 interlanguage에서 형용사로 수식된 명사의 경우 현저하게 -s를 빼먹는 경향을 발견했다는 연구를 발견했다. 그렇다면 L2(high intermediate-advanced)와 L3(beginner-intermediate)에서의 차이가 있는지를 다뤄볼 수 있지 않을까. L2 status factor 관련.


 아무튼 내가 하는 공부의 좋은 점은, 흥미로운 언어 현상을 발견하면 전통적인 언어학의 갈래에 매이지 않고 연구 질문을 만들어 볼 수 있다는 거다. 연구계획서는 박사 지원할 때도, 박사 과정중에도 여러번 필요한데 앞으로는 궁금한게 생길 때마다 요렇게 조금이나마 조사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들에 관해서는 생각을 조금 더 정리해서, 정말 뭐라도 뽑을 수 있는 주제인지 교수님과 의논을 해봐야겠다. 아아아, 졸업논문만 다 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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