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시시콜콜한 일상의 기록

일기

2016. 1. 21. 02:20

  레깅스 위에 기모 추리닝을 덧입고, 위에도 얇은 티를 세 장은 껴입고 그 위에도 또 니트, 두꺼운 등산 잠바(아빠꺼), 그리고 동생네 학교 패딩을 입고 나왔더니 하나도 춥지가 않다. 눈만 내놓고 얼굴도 목도리로 칭칭 둘렀다. 어제는 춥다 못해 살이 베일 것 같이 아팠는데, 오늘은 확실히 덜 추운 걸까 아니면 내가 너무 많이 입은 걸까...?


 아무튼 해그리드만한 덩치가 되어 뒤뚱뒤뚱 헬스장에 갔다. 며칠째 체기가 가라앉질 않아 공복으로 좀비처럼 지내고 있지만 그래도, 운동을 하지 않으면 공부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헬스장 데스크에는 처음 보는 사람이 앉아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오늘은 듣도보도 못한 노래들이 나왔다. 평소에 니 몸매가 어떻다는 둥, 어딜 만지고 싶다는 둥 하는 자세히 들을수록 낯뜨거운 노래가 나오던 것에 비하면 새롭고 좋았다. 나는 스트레칭을 마치고 제일 자신 없는 팔굽혀펴기로 시작하려고 매트를 펼친 건데, 한 세트를 하고 잠깐 쉰다고 엎드렸다가 잠이 들어버렸다. 여기엔 분명 가곡인지 발라드인지 처음 들어보는 느릿한 노래도 한몫했다. 한 십분 정도, 기절하듯 자다 일어나니 주위에 사람이 가득했다. 그 사람들이 하나같이 땀 흘리며 몰두하는 분위기에 고무되어서 나도 유산소까지 두 시간 가량 ‘파이팅 넘치게’ 운동했다. 규칙적으로 운동하니 역시 살이 빠지고 있다. 살이 빠졌다기보다는, 완만한 하락세가 시작됐다. 이런 건 측정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몸의 부피를 줄이고 싶진 않지만, 무게가 줄면서 단단해지는 것 같은 어렴풋한 이 느낌은 ‘올바른’ 방향인 것 같다. 피로하면서도 가볍고 좋은 기분, 그 기분을 만끽했다. 이런 시간은 제 궤도에 있는 것만 같다. 하릴없이 그냥 보내는 시간과는 다르게 어떤 서사적 의미를 지니는 것 같이 느껴진다.


  아무리 혼자 다니며 아껴봐도, 하루에 만원은 넘게 쓰게 된다. 한 끼 정도 사 먹고(그마저도 김밥 혹은 샌드위치), 공복을 달래기 위한 군밤이나 고구마 말랭이, 거기에 물, 커피 등을 사면 만원은 우습다. 택시비나 초콜렛이 더해지면 금방 이만원이다. 책이나 필름, 화장품이라도 사면 답이 없다. 그래도 각종 브랜드의 세일 정보를 전혀 모르고 있는 나를 보며 속세에서 멀어지긴 했구나, 하고 느낀다. 아무튼, 작년엔 학교에서 장학금을 엄청나게 받았는데, 야금야금 생활비로 다 까먹고 있다. 일년치 생활비 정도는 저축해놓고 싶었는데. 그런데 국민연금공단에선 얼마 전부터 연금 가입하라고('든든한 노후, 미리 대비하세요!') 징그럽게도 계속 우편물을 보내온다. 소득도 없는 내게 왜이러는 거지... 장학금도 소득으로 잡히나... 아무튼 이 나이에 돈 한 푼 못버는 내 처지를 상기하는 이런 우편물은 수신거부 하고싶다. 국민연금? 연말정산?? 소득공제??? 너무 낯선 개념들.





 요새는 모든 소통이 문자로 이루어진다. 입을 열 기회는 별로 없고 지겹게 이메일, 이메일, 워드 파일, 엑셀, 문자 메세지… 가끔 전화라도 할 일이 생기면 말로 내용을 전달하는 행위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고까지 느껴진다. 그저께인가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생각지도 않던 연락이 왔는데, 새벽 두 시 반에 울리는 알림을 보며 놀라움과 반가움과 설렘에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지만, 마음을 글자로 고정해 건네고 싶지 않았다. 사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는 것이 더 컸다. 서너 번 읽고, 메일함을 닫았다. 나도 모르게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가, 작게 소리도 질렀다가, 겨우 바로 눕고는 온몸에 크게 울리는 심장 소리를 들으면서 잤다. 잠들기까지의 그 시간이 마치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서 끝없이 어딘가로 떨어지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다행히도 하루 만에 새 메일이 우수수 쏟아져서 돌부리 같은 메세지는 보이지 않는 창 아래로 파묻혔다. 사실 문자든 입말이든 피로하다는 건 그냥 핑계이고, 대면할 용기가 없다. 기꺼이 또 한 번 뛰어내리고 싶다가도(그 순간만큼은 떨어지는 게 아니라 날고 있다고 느껴지니까), 그냥 없는 일인 것 처럼하고 싶기도 했다. 갈팡질팡. 아,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다... 가만 있어야지.


 아무튼 오늘은 기분이 하루종일 좋았다. 학교 안의 카페에는 아주아주 친절한 언니가 있는데, 오늘도 마치 아는 사람인 것처럼 '어 안녕하세요!'하고 활짝 웃으며 인사해줬다. 그 인사말이 마치 '오셨어요!' 쯤의 반가운 인사로 들렸다. 그 발랄함에 나까지 기분이 유쾌해졌다. 조금 이따가는, 머리를 싸매고 논문을 읽는 중에 이것 좀 드셔 보세요, 하면서 버섯과 치즈가 잔뜩 들어간 파니니를 작게 잘라 (모든 고객에게) 나눠줬다. ㅎㅎㅎㅎ. 자리를 옮겨 한참 일하다 도서관을 나오는 길에도 친절한 사람이 있었다. 대문을 열려고 팔을 손잡이에 대고 어깨에 체중을 실어서 밀었는데, 바닥이 미끄러워서 문은 안 움직이고 나만 뒤로 밀려났다. 덩치에 안 어울리게 약한 척하는 것 같아서 부끄러웠는데 뒤에서 누가 문을 밀어줬다. 그리고선 앞서나가서 한 겹 더 있는 문을 열고 잡아주기까지 했다. 이런 걸 보면 세상은 아직 훈훈하다! 걸어 나오면서는 오늘 충동적으로 산 비싼 초콜렛 한 알을 통째로 입에 넣었다. 혼자 있을 땐 뭐든 야박할 정도로 작게 잘라서 먹는 것이 습관인데(조금씩 먹어도, 많이 먹어도 맛은 똑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꽤 걸어 나오는 내내 입안에 가득 차는 맛을 누리면서 이것도 나름의 쾌락이구나, 하고 깨달았다. 택시 아저씨마저도 유쾌하고 친절했다. 콧노래와 들뜬 마음을 여기에다 쏟아놓는다.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풀이  (0) 2016.01.23
제목없음  (1) 2016.01.23
l'étranger  (0) 2016.01.19
어떻게 오늘은 또 오늘이네요  (4) 2016.01.14
끝없이 펼쳐진 들  (0) 2016.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