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정리

일기

2016. 2. 10. 01:19



 연례행사를 맞이해 기념사진을 찍었다. 의자는 옷걸이로, 책상은 온갖 물건을 늘어놓는 선반처럼 썼었는데 싹 치우고 빈 책상에 앉는 느낌이 새롭다... 좋다ㅎㅎ. 정리중 발견한 메모에는 '우리는 얇게 썰린 소세지가 생각할 수 있다면 생각할 법하게 생각한다. 사실, 우리가 더 나을 것도 없다(Nous pensons comme un saucisson coupé en tranches pourrait pensait, s'il pensait. De fait, nous en valons guère mieux).'라는 말이 있었다. 메쇼닉이 인간 사고의 분절성에 대해 한 말이었던 것 같은데 '얇게 잘려진 소세지'라는 비유가 진지한 책에 나오는 게 귀여워서 적어놨던 기억이 난다. 


 쌓여있던 잡동사니 중에는 '여자없는 남자들'이라는 책도 있었다. 밥 잘 먹었다며, 한적한 영풍문고에서 책구경하다 선물받은 소설이다. 내 주위 아무도 이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혹시 내가 뷰티풀 마인드의 주인공처럼 망상으로 모든걸 꾸며낸 건 아니었을까, 라고도 생각해봤는데 책이 딱 나와서 웃음이 났다. 갑작스레 연락이 끊기고도 한참을 속상해하고 아쉬워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이제는 드디어 이게 지나간 일이라는 걸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사랑? 호감? 뭐든 관계를 지속시키는 그 감정이 동시에 끝나지 않는다는 건 서글픈 일이다. 그치만 그 사람은 짧은 시간동안 내게 많은 것들을 남겼다. 꼭 고통을 통해서만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불안만이 생산과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됐다. 원초적인 무력감, 고독감이 내면으로 시선을 돌리게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보다 더 건강한 방법으로 나를 이해하고 가꿀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적인 능력과 정신적인 능력을 모두 사용하고 나누는 관계에서는 편안한 결속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관계를 통해 성장할 수 있다는 것도. 그러니까... 사랑에 대한 회의를 덜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취향이 있는 사람',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의 차원과는 달리 관계 자체에 대한 방향감각, 지표가 생긴 것 같다. 책은 책장에 잘 꽂아 두었다.




 전 남자친구가 준 귀요미. 사실 한 사람을 빼고는 많은 이들의 흔적이 곳곳에 그대로 있다. '어떻게 이렇게 귀여운 걸 발견했지?'에서부터 '우리는 아니라는 것을 알기까지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릴 필요는 없었는데'까지 이런저런 생각이 나기도 하지만 마음에 별 감정이 일진 않는다. 무슨 회상이든 항상 마지막엔 그 사람들은 나와 역할극을 하면서, 그걸 짐스럽게 여긴 것 같다는 인상으로 연결된다. 온전히 상대방과 보내는 지금 이 순간에만 집중하는 건 불나방같이 무작정 들뜬 마음이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레 빠져드는 상태, 꼭 가져야 할 태도라고 생각하는데 자주 나만 사춘기 문학소녀 감성에 빠져있는 것처럼 느끼게 되곤 했다. 다들 한 걸음 정도만 발을 뻗었고, 나머지 한 발은 제자리에 꽉 디뎌 고정하고는 조금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남 탓만 하려는 건 아니다. 그 사람들에게 내가 괜찮은 사람이 아니었거나, 나와는 다른 나름의 가치체계가 있었겠지. 이런 저런 선물이 남았고, 다양한 체험을 했고, 그래서 그들과의 관계는 지난 세월을 가늠할 때 연도에 우선해 시기를 나누는 기준이 됐지만 사랑하지 않은 사람과의 관계에선 가치관에 통합할 만한 인식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반면, 가장 오래만나서인지 가장 가까웠어서인지 X는 내게 첫번째 레퍼런스가 됐다. '관계'하면 항상 떠오르는 참조점.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랑을 받는 법도 학습이 필요한데, 내가 딱 그랬다. 뚜렷한 이유나 목적없이 누군가 나를 좋아할 수 있다는 걸 그 전까진 몰랐다. 누군가 다가오면 나를? 왜?? 착각일거야. 금방 실망할거야. 라는 생각에 항상 겁부터 먹고 도망다녔는데, 꾸밈없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경험은 처음이었고... 그런만큼 그 만남은 인생에서 중요한 사건이 됐다. 왜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사람은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서, 집을 나오면 볼 수 없어도 책상이 그 자리에 계속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그 사람의 인생? 머릿속? 마음 그 어딘가에는 내가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덕분에 피폐한 마음에 안정감이 생기고, 자존감이 높아지고, 많이 밝아졌다. 사랑받는 경험을 통해서 건강해지는 것 말고도 무조건적으로 의존하면 안된다는 것, 아무리 가까워도 하나가 될 수는 없다는 것처럼 관계에 중요한 것들을 많이 깨달았는데, 나도 그사람에게 준 것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내게 해준 만큼 그대로, 상처와 결핍까지 보듬어주는 사람을 만나서 건강히 잘 살았으면 좋겠다.


 과거의 경험을 모두 더한다고 내가 만들어지는 건 아니지만, 경험으로 얻은 것들은 나의 큰 부분을 이루고 있다. 인간과 관계, 삶에 대한 지혜는 어느 책을 펴도 조금씩 찾을 수 있지만 머리속에 글자로 돌아다니는 그 지식과 달리 경험으로 얻은 인식은 내 안에 새겨진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건 모두가 선뜻 동의하는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사고하고 행동하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하다. 내 경험과 생활방식을 토대로 상대방을 바라보는 태도를 버리는 것 부터가 절대 쉽지 않다. 스무살보다 서른살에 훨씬 가까운 지금은 허우대가 멀끔하다고, 머리가 비상하다고 무작정 이성에게 끌리지 않는다. 이 문화 안에서 짜여진 대본을 따라가는듯한 그런 관계는 더이상 맺고싶지 않다. 기꺼이 몸을 던져 나름의 시행착오와 고민을 겪어온 사람, 그래서 사람도 삶도 사랑할 수 있다는 믿음에 다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다. 똑같이 삶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더라도 비관이나 회의, 냉소에 젖지 않고 그 무의미함을 편안히 받아들이는 사람. 그러니까 적어도 이 세상을 사랑하겠다는 그런 다짐같은 믿음을 향해있는, 냉소보다는 미소에 더 가까운 사람. 경험과, 경험에서 비롯한 가치관과, 가치관에서 뿌리내린 믿음이 없으면 흔적없는 관계만 되풀이 될 뿐이다. 


 나는 아직도 못난이 우울증 환자지만... 사람들을 겪으며 모난 구석을 부지런히 깎아냈고, 겁먹지 않고 한 발 먼저 다가갈 수 있게 됐다. 앞으로 나이가 들고 꼬부랑 노인이 되어도 항상 인간 됨됨이에 대해 반성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싶다. 원만하고 차분하고 일상의 소소한 지혜가 많은 사람. 그리고 관계를 맺게 된다면 연인이든, 남편이든, 자식이든 나 아닌 다른 사람은 항상 타인임을 상기하고 조심스럽게 대하고 싶다.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모두 항상 생생하도록. 책상을 치우다가, 토막난 소세지같은 생각을 하다가 내린 마지막 결론은: 사랑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겠다는 것. 거기에 더해 조금 부족한 연구자가 되더라도 온 몸과 온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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