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rrière l'amertume

일기

2016. 6. 5. 01:28



 새벽 두 시 반, 뛰는듯한 걸음으로 언덕을 올라오다 보니 얼마 전 본 맹수들의 사냥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생각났다. 들개 무리에게 추격당하는 물소가 자신은 아직 체력이 충분하다는 것을 과시하려, 달리는 와중에 쿵쿵 과한 점프를 하는 모습. 비슷하게, 팔다리를 휘저어가며 있는 힘껏 걷는 내 모습이 나는 취하지 않았다, 기운차다는 메세지를 담고 있는 것 같아서 우스꽝스러웠다. 그러다 곧 서글퍼졌다. 


 사치스러운 생활, 카드값을 감당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맡고 나니 귀가시간이 점점 늦어진다. 그룹 과외와 번역을 시작했고, 공동 프로젝트는 국제 학회를 앞두고 가장 바쁜 시점에 다다랐다. 게다가 졸업 논문의 본심이 며칠 남지 않은 이 와중에 주 5회 운동과 꾸준한 술자리를 고집하고 있다. 공부와 일, 여가 사이사이의 전환에 쓸 수 있는 시간이 없다. 무엇이 됐든, 뒤돌아 앉자마자 바로 주어진 과제에 몰입해야만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다. 잠깐 만났던 사람은 그래서 정리했다. 말과 행동이 맞지 않는 그 사람을 이해하려 애쓰는데 쓸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가 없었다. 처음 만나서 호감을 확인하고, 웃고, 대화하고, 자고, 설렘이 시드는 관계의 흥망성쇠가 순식간에 압축적으로 지나갔다. 


 가볍고 덧없기로 비슷한 관계가 앞뒤로 몇 번 더 되풀이되는 동안 초콜렛을 까먹는 기분이었다. 그냥 재미있었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지 않았고, 이해받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달콤하니 들뜨는 기분이 끊이지 않는다는 게 좋았는데 어제는 내 머리 위의 낯선 손, 그리고 조용히 해야 한다는 말에서 문득 환멸을 느꼈다. 이 말과 손이 분명한 반복이었는데, 어렴풋이 떠오르는 장면이 영화인지 꿈인지 잠깐 만났던 누군가인지 알 수 없었다. 환멸이 몸을 짓눌러서 말없이 숨만 몰아 내쉬었다. 그 후론 공사, 친소의 경계없이 모든 관계가 동물들의 사냥으로 보인다. 우습고 가소로우면서 측은하다. 아무것도 어렵진 않은데, 피로하다. 그 안에서 24시간 여자로 살고 있다. 내가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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