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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2016. 9. 11. 14:14

Two Studies for a Self-Portrait, Francis Bacon



출근길, 매번 똑같은 시간에 집을 나선다. 100분 정도를 졸다가, 걷다가, 무료해하다가 사무실에 도착. 매일 아침 일곱시에 일어나서부터 사무실을 나서는 일곱시까지는 무려 열두시간이다. 매일 온종일을 똑같은 곳에서 소비하는게 기괴하게 느껴진다. 도대체 내 삶은 언제 살라는 말이지.


점심시간. 밥 생각도 없고 운동도 안 내켰다. 과자 하나 까먹고 잠이나 잘 생각으로 소파 근처를 기웃거렸는데 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책상에 앉아, 뜬금없이 떠오른 모네의 Le Havre 그림들을 찾아봤다. 스크롤을 천천히 내리다 찔끔 울었다. 무기력하고 싫다. 엉망진창이다.


오후엔 꼭대기 층에 올라가 마사지를 받았다. 여기선 근육을 누르는 느낌이 아니고 생소하게, 뼈 위에 붙은 것들을 흔들흔들 미는 느낌. 계속 도가니가 생각나다가 나중엔 간지러웠다. 몸이 자꾸 움찔거려서 부끄러웠다. 목 뒤로 내 머리카락을 서툴게 쓸어 넘기는 손짓에서 여기 다시 오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느낌-가다. 느낌-가득하다. 느낌-갑갑하다. 느낌-강하다. 느낌-거칠다. 느낌-견고하다. 느낌-과하다. 느낌-괜찮다. 느낌-구겨지다. 느낌-길다. 느낌-깊다. 느낌-까칠하다. 느낌-깨끗하다. 느낌-끌리다. 느낌-끼다. 느낌-나다. 꼿꼿이 앉아 정제되지 않은 엔트리를 멍하니 읽는데 왠지 느낌-야하다.


해가 지고 느지막이 도착한 동아리 OB 술자리엔, 내 맞은편에 앉아 입은 남들을 따라 웃지만 굳은 눈으로 홀낏홀낏 내 눈치만 살피는 사람이 있었다. 지난 봄, 술에 곯아떨어진 나를 밤새 못살게 굴었던 더러운 새끼. 떨리는 손으로 내게 따르는 술을 비웃는 마음으로 연거푸 들이켰다.


우습다. 화도 나지 않고 우울하지도 않다. 마음은 무감각한데 이상하게 몸이 과민했다. 홍대의 요란한 불빛, 텁텁한 바람, 사람들의 말소리, 거리에 섞인 음식, 쓰레기 냄새 등 온갖 자극이 몸을 만지는 것 같았다. 혼자 처음 가는 바에 들어가 앉았다. 천천히 세 잔을 마셨다. 


기쁨이, 초록이처럼 동화에 나올법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알게 됐다. 따뜻한 낯으로 내 자리를 마련해주고, 술과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우울병 환자예요, 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마티니를 안주삼아 진을 마셨다. 술로 입을 막았다.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누구든 금방 좋아하게 될 것 같아서, 기억을 더듬어 보고 싶지 않았다. 숙취는 없는데 오래도록 술이 깨질 않았다. 아, 덥썩 좋아하게 될 것만 같아서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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