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도 우울삽화

일기

2017. 6. 9. 15:16

 억지로 몸을 끌고 헬스장에 올라갔으나 도저히 운동할 기운이 나지 않았다. 샤워실에서 머리를 감으며 주륵주륵 울다가 바디 오일을 바르면서 겨우 정신을 차렸다. 붉은색 섀도우를 눈두덩이에 문지르고 밖으로 나왔다. 햇빛을 쐬며 앉아있고 싶었지만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아무데도 없었다. 광장에 혼자 앉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우울할 때는 별 거에 다 용기가 필요한데, 이런 순간엔 계속 몸을 움직이고 발을 내딛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가만히, 맘편히 햇빛을 쐬는게 어려운 일이라 슬펐다.


 우울하다는 건 숨길 거리도 내세울 거리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보통은 그냥 조용히 있는다. 그런데 오늘은 ‘요새도 약 먹니? 니 힘으로 이겨내야지’ 라는 말을 들었다. 가끔씩 어른들은 걱정이랍시고 이런 말을 하곤 하는데, 그럴 때면 표정 관리가 되질 않는다. 기분이 상하고 헛웃음이 나는데, 억지로 힘을 쥐어짜 맞장구치고 겨우 상황을 넘긴다. 저런 말들은 상처가 되어서, 똑같이 상대방을 할퀴고 싶게 만든다.

이런 정도의 몰이해는 감당할 수가 없다.



 그 사람들은 솔직할 수 있는게 몸밖에 없거든요. 외관이 마치 허름한 창고처럼 생긴, 비밀스런 바에서 X가 잠깐 눈을 저 멀리 바깥으로 돌리며 한 말. 우울한 사람들은 몸에 예민하다, 몸에 집착한다. 그 말이 나를 콕콕 찔러서 적당히 흘려 보낼 수가 없었다. X가 하는 말이나 행동은 CG처리한 영상처럼, 느린 화면에서 아주 선명한 빛으로 움직일 때가 많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온전하지 않은 정신으로 옷만 서둘러 입고 나왔다. 급한 마음으로 택시를 잡는 길가에서도 이 대사는 머리속에서 계속 깜빡였다. 뇌에 온통 모래 먼지가 낀 것처럼, 배에는 풍선이 들어차 숨통을 막고있는 것처럼 답답했다. 택시를 타서는 머리 가누기를 포기하고 허벅지 뒷쪽...부터 몸의 근육통을 샅샅이 찾아내고 있으니 X의 대사가 또 날 콕콕 찔렀다. 내가 필사적으로 마음의 일들을 회피하고 있다는 간단한 사실을 정말로, 그제서야 깨달았다.



있는 힘껏 쇼핑을 하고 돌아오는데 이어폰으로 로드리게즈가 속삭이길: 

"Don't try to charm me with your manner of dress, cause monkey in silk, is a monkey no less." 

곧이은 곡에선:

 "You change your mind so many times, I wonder if, you have a mind, at all." 

아니 다들 어쩜 이렇게 신랄한 거지.​



"God, tell us the reason - youth is wasted on the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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