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일기

2018. 11. 11. 21:46

말로 꺼내긴 좀 멋쩍은 일인데, 오랜만에 누군가를 만나고 설레는 꿈을 꾼 게 좋아서 다시 자려고 자려고 노력하다가 오후 세 시가 넘어서 일어났다. 카페 야외 테이블, 마주앉은 남자의 얼굴을 곰곰히 뜯어 보았는데 눈이 마주칠 때마다 긴장이 되어서 아주 빤히 쳐다보지는 못하고, 그런 와중에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어디서도 보지 못한 스타일의 생김새라는 생각을 했다. 영화에 건들건들한 조연으로 나올 법한 인상인데, 이상하게 자세히 뜯어볼 수록 순수함과 매력이 있었다. 목소리와 말투에 집중하니 살짝 닭살마저 돋았다. 얼굴은 떠오르질 않는데, 나는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될 거라는 확신이 차오르는 순간, 그 느낌이 선명히 남았다. 꿈의 다른 장면이지만 군살없이 매끈한 여자의 등줄기와 나풀나풀 날리는 긴치마 자락, 침이 잔뜩 고일만큼 짜릿한 감각도 같이 기억이 났다. 

유학 가기 전에 생활비나 벌어볼까, 하고 어쩌다 시작한 직장 생활이 벌써 2년 반이다. 더 좋은 자리, 더 좋은 일을 찾아서 계속 '업그레이드'를 하려고 아둥바둥하다보니 감상이란 걸 가져본 지가 까마득하다. 알 수 없이 울컥하는 감정이 차오르면 재빨리 치워버리고 다시 건전한 사회인으로 기능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일,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컨디션을 만들기 위한) 운동, 그리고 (일에서 재빨리 멀어지기 위한) 술 외에는 이렇다할 관심사도 없어지다 보니 일과 처신 사이에서 생기는 불편감 외에는 특기할 만한 감정이랄 게 없는 상태에 이른지도 오래다. 배에 살이 포동히 올랐다. 그냥 말단 직원일 뿐인데 이렇게 쓰니 무슨 대단한 워커홀릭같네... 사실 이게, 어색할만큼 오랜만에 일기를 쓰는 이게 다 당장 이틀 후에 잡힌 이직 면접 공부를 하기 싫어서다. 그치만 제발 뽑아줘요 연봉도 올려줘요 에스케이. 근데 어제 밤 꿈 때문에 마음이 산만한게 그냥 연애나 하고 싶다. 아...

1차 면접은 테스트 위주라고 하는데, 정말 시험만 풀고 그 답안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이전 회사나 신상에 대해선 뭐든 '저기,,, 제가 경력이 겨우 2년 좀 넘었는데,,, 뭘 그렇게 잘 알겠습니까,,,'하고 싶은 심정. 그리고 제발 졸업 논문은 안 물어봤으면 좋겠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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