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주정

일기

2018. 11. 20. 15:39

​술을 마시는 게 버거워서, 퇴근 전에 잠시 약국에 들러 RU21을 다 사먹었다. 먹으면 취하지도 않고 숙취도 없다는 마법의 알약. 두 달 전 조직 개편 직전에, 우리 팀으로 이동하신 과장님과 원래 술 좋아하던 멤버들이 우연히 회식을 했었는데 이상하게, 이상하게 그 날 그 자리가 그렇게 신이나서 모두가 과음했던 적이 있다. 사람들은 다음날 급하게 휴가를 쓰고, 나는 휴게실에서 하루종일 잠만 잤을 정도로 전례없이 많이 마셨더랬다. 사실 이상할 건 없다. 그 때는 처음 본 그 과장님이 멋있다고 생각해서 눈이 마주칠 때마다 긴장하고, 그랬었으니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계속 지내다보니 대꾸할 말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주옥같은 '아재' 멘트라 긴장감은 똑 떨어졌지만, 커다란 흰곰같은 외모는 아직도 (내 눈에만) 빛이 난다. 아무튼 그런 연유에서, 술쟁이 상사들이 들이붓는 소주가 무서우면서도 영 싫지많은 않은 그런... 회식자리였다. 이제는 다른 팀으로 흩어졌지만 정기적으로 만나 술 콸콸 붓는 모임.


전골집이 너무 더워서 나는 니트를 벗었고, 한 겨울에 반팔티를 입고도 부채질을 하니 맞은 편의 대리님이 내가 지금 여기서 제일 시원하게 입었다고 말했을 때의 애매한, 오바스럽다는 듯한 순간의 눈빛이 중요한 게 아니고. 술을 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빈 소주병이 정말 순식간에 주르륵 쌓였다. 무슨 얘기인지 기억도 안 나는데 웃고 떠드는 게 재미있었다. 사람들은 다음주, 다음달, 그 다음달... 계속 약속을 잡았다. 이 모임에 어떤 멤버를 초대할 건지, 다음엔 어디를 갈 건지, 뭘 먹을 건지 하다가 캠핑 날짜까지 잡혀버린 수준. 다음주에 임원 면접이 잡힌, 아직 붙진 않았지만 혼자 마음속으로는 진작 퇴사를 결심한 나는 얼만큼 맞장구를 치고 웃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편하질 않았다. 다음을 선뜻 약속하기 어려운데, 가만히 있다가 나중에 아주 엉큼하게 사람들을 속였다고 볼까봐 마음이 쓰이고. 그렇다고 확정된 것도 아닌데 말을 흘릴 수도 없고. 더불어 나는 불러주는 사람이 있어 여길 떠난다고, 괜히 우쭐한 기분을 티내고 싶기도 하고. 그러면 안돼, 아무튼 안돼하고 속삭이는 제정신인 내가 있고.


나는 겸손하고, 사람들을 깔보지 안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은데. 그게 내가 원하는 사회인으로서의 내 모습인데. 자꾸 회사, 팀, 내가 속한 이곳의 모든 조직이 우스워서 헛웃음이 나다가 짜증이 치밀다가 '그러면 안돼...'하며 오락가락하기를 약 한 달째다. 전문가는 커녕 제대로 된 시스템을 구경해본 사람조차 없어서 회의라도 할라치면 내 쪽을 홀끔홀끔 보며 이야기한다. 우왕좌왕하는 어르신들 기다리며 혼자 업계 트렌드, 경쟁사 기술 관련 문서를 정리하고 있었는데 어쩌다 높으신 분들께 보고가 가고 (농담조이지만 부담스럽게 두번씩이나 공적인 자리에서) 사내 교육을 맡으란 이야기까지 나오면서 아주 환장할 지경. 그럴 거면 제가 과차장정도 달고 연봉도 한 두 배 높여서 왔죠. 가 아니고 나는 사실 그렇게까지 자세히 아는 게 없는데 사람들은 그걸 파악할 눈조차도 없거나, 그마저도 아쉬운 상황인 거다. 그리고 원치않는 주목을 받으며 불편한 견제나 시선도 같이 생겼다. 환장환장 대환장파티.


다른 회사에 서류를 내고 시험 치루면서, 울렁울렁 조마조마한 마음때문인지 지난 1-2주간은 속 마저도 영 좋지 않아 몸을 사리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술을 마시니까 신이 났다. 끔찍한 소주를 못해도 두 병은 넘게 마셨는데 RU21 덕분에 마음만 들뜨는 것이, 균형감각 시간감각 언어감각 모두 멀쩡했다. 흥이 오른 사람들과 놀러가자 놀러가자 소화하자 하다가 우르르 클럽에 갔다(전개 무엇). 예쁘고 잘생기고 어린 사람들이 많아서 뻘쭘했는데, 어둡고 시끄럽고 북적북적 반짝이는 곳에 들어오니 재밌었다. 딱히 익숙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노래들을 고래고래 따라부르고, 발도 구르고 손을 휘저어댔다. 뒤에서 누군가 날 끌어 당겼는데, 차장님이 손을 쳐내주셨다. 내심 눈 꼭 감고 아무한테나 기대고 싶었는데. 하나도 안 감사했다. 번쩍번쩍 정신없는 틈에 '저 퇴사하려고요...'라고 기어이 내뱉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알 수 없는 차장님의 표정. 내가 엄청 따랐는데, 귀뜸없이 다른 팀으로 떠나버리신 차장님. 차장님한테 배울 것도 많고 인간적으로도 잘 맞는다고 생각해서 지난 봄에도 다른 분이 우리 회사 원서 써보라는 걸 거절했는데.


한시간 반 바짝 놀고 나오니 시간이 거의 두시. 서울 외곽, 경기도에 사는 사람들은 일찌감치 택시를 타고 떠났는데 나만 죽어도 택시가 안 잡혔다. 심야 버스를 타야되나... 하다가 엄두가 안나서 데리러 오라고,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금요일 밤이다보니 엄마도 동생도 이미 술을 마셨다고 하고. 그리곤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왜 그랬는지도 모르겠는데 곧장 친한 후배한테 전화를 걸었다. 데리러 오라고. 후배는 뭔소리야 나 차도 없어, 하더니 쏘카 타고 오라는 내 말에 진짜로 알았다고 했다. 공덕에서 강남까진 한세월이니,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를 하나 샀다. 매번 사던 2,700원짜리 오비 프리미어로 손을 뻗다가, 아니, 내가. 돈을 버니까. 돈도 버는데. 세일 안 하는 것도 살 수 있지. 하면서 4,400원짜리 기네스를 꺼냈다. 마침 빌딩 사이의 공터가 기가 막혔다. 아무도 없는데, 대로가 코앞이라 위험한 느낌도 아니고, 바람도 잘 들고 낮에는 보이지 않던 벽화도 보이고. 평소엔 드라마 여주 따라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혼자선 공터에서 술도 못 마셨는데, 이날은 아주 눈물까지 닦아가며 나무 데크에 기대서 맥주를 마셨다. 아니 이상하게 눈물이 자꾸 차올랐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냥... 


그 뒤로는 아주 점입가경이다. 도착한 후배를 봤는데 갑자기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차 옆에 앉아서 계속 훌쩍훌쩍하다가, 콧물도 흘리고. 운전 면허도 없는 나는 갑자기 운전하는 후배가 너무 어른스럽게, 듬직하게 보여서 나(훌쩍) 너랑 결혼해야 되냐(훌쩍) 같은 헛소리도 하고. 광화문께 와서는 커피를 한 잔 마셨는데 환한 카페에서 눈물 범벅인 얼굴을 들기가 창피했다고 생각한 기억이 난다. 그리고 집앞까지 와서는 내리기 싫다고 생각한 기억도 난다. 자기 전에 고맙다고 문자를 보냈는데 후배는 정말 개쿨하게 끝까지 답장이 없었다. 나중에도 야 내가 그때 깊게 감동했다는 말에 자기는 깊게 빡이 쳤다고 대답했다. 아... 어... 미안하다 내가... 눈꼽만큼이지만 혼자 김치국 마셔서 미안해...


아무도 나한테 구박하지 않고, 아무도 내게 급히 요구하는 것이 없는데. 괜히 혼자서 받는 스트레스가 왜이렇게 많은 건지. 회사에서 믿고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도, 개인적으로 터놓고 의지할 사람이 없는 것도 나한테는 너무 큰 시련이었던 거다. 인정받고 싶으면서도 막상 주목받는 건 부담스럽고, 겸손하고 싶은데 자꾸 남들을 무시하는 마음이 생기고. 사실 확정된 것도 아닌데, 회사를 반쯤 이미 떠난 것 같은 마음으로 갈팡질팡. 그러다보니 그 늦은 시간에 나를 데리러와주고, 조용히 운전하는 모습이 크게 다가왔던 거다. 그게 감동스러워서, 술 마시고 약해진 마음에 펑펑 울었던 거다. 예전 같았으면 내가 또 실수했나, 나 혼자 착각했나, 나는 도대체 왜 그랬지, 아... 하면서 머리 싸매고 괴로워했을텐데. 이제는 내 마음이 보인다. 별 것도 아닌 사건들이 나에게는 큰 파도처럼 다가오는 걸 알겠다. 파도를 파닥파닥 맞아내며 조금씩 움직이는 모래밭의 마음을 상상해봤다. 그 누가 아무리 치대도 우아하게, 사르르르...



(오씨 쓰던거 날라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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