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일기

2012. 10. 5. 06:26


1.0
편지를 써달라고 써달라고 편지를 편지를... 하다가 남자친구가 화를 냈다.

1.1
'사소한 것에서 터지는 경우'라니, 사소한 것이 어떻게 터질 수가 있을까? 그러니까 편지 써달라는 징징거림은 기폭제였을 뿐이다. 그사람이 나만큼이나 차곡차곡 쌓아왔다는 것이 놀라웠다.

1.2
대화, 대화 대화 말, 말 말.

내게 편지(정성, 시간, 진심, 애정표현)는 그사람에게 편지(???)였을 뿐이었고 우리는 서로 왜 화가 났는지, 왜 편지를 요구했는지 이해가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서로의 입장과 감정에 대해 더 직접적으로 설명하기로 하는걸로 끝맺었다.



2.0
이해가 상대방 입장의 근거에 대한 타당성 납득이라면 나는 그사람을 이해한게 맞다. 하지만 이해가 상대방의 감정에 대한 헤아림을 포함한다면 나는 그사람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짜증이 그렇게 올라오는, 그리고 한번 걸러서 표현할 인내심이 바닥난 마음상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2.1
그사람은 평소 일상적인 나의 말에서 짜증이 날 때가 많았다는 말과 (구체적으로 묻는 내게) 그런 지엽적인 것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을 동시에 했다.

사람 스타일이다. 어떤 일에 있어 전체를 먼저 보는지 부분을 먼저 보는지는. 그렇지만 사람을 파악하는데 전체를 먼저 보는게 가능한걸까? 그 사람이 외국 음식의 이름을 전혀 모르는 것을 보고 여자인 친구와 밥 먹으러 다니는 편이거나 다양한 외식을 시도하는 집안 분위기는 아니겠구나, 하고 짐작하거나 음원 사이트에서 리스트 그대로 받은 스무곡 남짓의 최신 인기곡을 보며 음악을 크게 즐기지 않는 것을 보니 감수성이 예민하지 않겠지?라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사례 없이 그사람에 대해 '감수성이 무디다'라거나 '이성을 잘 모르는 편이겠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거니까.

언젠가 싫은 것에 대해 예의를 차려 이야기하는 그사람의 모습에서 일순간 보인 오만상을 찌푸린 표정. 나는 그사람이 솔직하다고 느꼈다. 마음에 없는 말은 안하거나 못하겠구나, 하고. 내가 토로하는 불만에 일일이 방어적인 자세로 답하는 것에선 높은 자존심, 혹은 그에서 비롯되는 진중함과 치밀함을.

최근의 걸러지지 않은 짜증과 고압적인 말투는...



3.0
크고작은 싸움이야 연애에서 늘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예전의 일기를 뒤적여보면 일상에서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에서 묻어난 애정에 대한 이야기가 많고, 항상 사랑받고있다는 느낌이 대부분의 갈등을 무마했던 것이 드러난다. 애愛.

3.1
그래서, 결국엔 더 사랑받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자 깨끗한 어투로 이런 경우는 겪어본 적이 없어 모르겠으니 일일이 어떻게 해야 서운하지 않은지, 사랑받는 느낌이 드는지 말해달라는 그사람. 자존심이 꺼지고 무기력감만 피어오른다. 나는 그 새 까다로운, 유별난, 짐스러운 사람이 된 느낌이다.

3.3
푸르스름하게 동이 튼다... 그사람은 가사가 없는 음악을 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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