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nfant gât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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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억지로 몸을 끌고 헬스장에 올라갔으나 도저히 운동할 기운이 나지 않았다. 샤워실에서 머리를 감으며 주륵주륵 울다가 바디 오일을 바르면서 겨우 정신을 차렸다. 붉은색 섀도우를 눈두덩이에 문지르고 밖으로 나왔다. 햇빛을 쐬며 앉아있고 싶었지만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아무데도 없었다. 광장에 혼자 앉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우울할 때는 별 거에 다 용기가 필요한데, 이런 순간엔 계속 몸을 움직이고 발을 내딛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가만히, 맘편히 햇빛을 쐬는게 어려운 일이라 슬펐다.


 우울하다는 건 숨길 거리도 내세울 거리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보통은 그냥 조용히 있는다. 그런데 오늘은 ‘요새도 약 먹니? 니 힘으로 이겨내야지’ 라는 말을 들었다. 가끔씩 어른들은 걱정이랍시고 이런 말을 하곤 하는데, 그럴 때면 표정 관리가 되질 않는다. 기분이 상하고 헛웃음이 나는데, 억지로 힘을 쥐어짜 맞장구치고 겨우 상황을 넘긴다. 저런 말들은 상처가 되어서, 똑같이 상대방을 할퀴고 싶게 만든다.

이런 정도의 몰이해는 감당할 수가 없다.



 그 사람들은 솔직할 수 있는게 몸밖에 없거든요. 외관이 마치 허름한 창고처럼 생긴, 비밀스런 바에서 X가 잠깐 눈을 저 멀리 바깥으로 돌리며 한 말. 우울한 사람들은 몸에 예민하다, 몸에 집착한다. 그 말이 나를 콕콕 찔러서 적당히 흘려 보낼 수가 없었다. X가 하는 말이나 행동은 CG처리한 영상처럼, 느린 화면에서 아주 선명한 빛으로 움직일 때가 많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온전하지 않은 정신으로 옷만 서둘러 입고 나왔다. 급한 마음으로 택시를 잡는 길가에서도 이 대사는 머리속에서 계속 깜빡였다. 뇌에 온통 모래 먼지가 낀 것처럼, 배에는 풍선이 들어차 숨통을 막고있는 것처럼 답답했다. 택시를 타서는 머리 가누기를 포기하고 허벅지 뒷쪽...부터 몸의 근육통을 샅샅이 찾아내고 있으니 X의 대사가 또 날 콕콕 찔렀다. 내가 필사적으로 마음의 일들을 회피하고 있다는 간단한 사실을 정말로, 그제서야 깨달았다.



있는 힘껏 쇼핑을 하고 돌아오는데 이어폰으로 로드리게즈가 속삭이길: 

"Don't try to charm me with your manner of dress, cause monkey in silk, is a monkey no less." 

곧이은 곡에선:

 "You change your mind so many times, I wonder if, you have a mind, at all." 

아니 다들 어쩜 이렇게 신랄한 거지.​



"God, tell us the reason - youth is wasted on the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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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에서 흙먼지 냄새가 난다. 어릴적 체육시간 운동장에서 모래 먼지를 한참 뒤집어 쓰면 머리카락과 손에서 나던 냄새. 이제는 흙바닥을 딛을 일도 없는데, 중국 사람들 때문에 이맘땐 항상 문 밖을 나서자마자 쿱쿱한 먼지 구름에 푹 파묻히는 것 같다. 바람이라도 살갗을 스치면 추행당하는 것처럼 불쾌하다. 중국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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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주일에 한 번씩은 할머니가 계신 요양원에 간다. 평창동 입구, 저택들 사이에 은근히 숨어있는 조용한 곳이다. 우리는 잠시 침상에 둘러서서 할머니 손을 잡고 말을 붙인다. 목소리를 내는 건 물론이고, 눈을 마주치지도 손발을 움직이지도 못하시는 할머니. 자식을 알아보시는지, 언어 능력이 온전하신지, 시간 감각이 있으신지, 시청각이 살아있는지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아빠는 마치 아기를 대하듯 한 층 높은 어조로 간단한 말들을 여러 번 반복한다. 어머니 잘 지냈어? 잘 지내셨죠? 으응? 잘 지냈지? 저는 아버지 보러 갔다 왔어요. 지난 주에 아버지 보러 갔다 왔어. 아버지 보러 현충원에 다녀 왔어요. 막내 보고싶지? 미국에 있는 막내 보고싶어? 막내 오라고 할까?

 아빠는 금방 지쳐 한숨을 내쉬며 복도로 나가고, 우리는 어색하게 우두커니 둘러서서 손을 잠시 어루만지다가 할머니 저희 다음 주에 또 올게요, 하고 나오는 게 일이다. 건물에 머무는 건 이십분 남짓, 아무도 외투조차 벗지 않는다. 나서기 전 방을 둘러볼 때면 항상 맞은 편 침대의 할머니가 침대에 일어나 앉아 밥을 천천히 떠 드시고 계신다. 하지만 눈을 마주친 적도, 말소리도 수저드는 소리도 들은 적이 없어 어쩐지 사람같이 느껴지질 않는다. 사람과는 다른 속도와 호흡을 가진 존재들... 요양원 방방에 미동없이 누워있는 노인들이 마치 식물같다고 생각했다. 사그라진 이파리에 물방울 조금씩을 겨우 얹고 있는 풀들. 호젓한 동네, 손이 닿지 않는 그늘에 가까스로 피어있는 풀들. 요양원은 묘지도 마을도 아닌 어떤 다른 세계인 느낌이다. 삶과 죽음 사이, 정확히는 삶보다 죽음에 훨씬 가까이에 있는 어떤 숨은 공간. 매주 일요일 나는 아주 잠시 죽음의 문턱을 밟고, 죽음의 살갗을 만지는 것만 같다.

 인간의 '존엄성'이 무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15년만에 할머니를 뵈었을 때의 인상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상실했다,는 것이었다. 눈물을 닦고 머리를 긁는 것조차 할 수 없고, 몇 번이고 입을 열어 무언가 말하려, 전달하려 애를 쓰지만 나오는 것은 형태없는 기식음 뿐인 상태... 몸의 왼쪽 반엔 갑작스런 마비가 왔고, 오른쪽 반은 침대에 묶이다시피 한 상태였다. 팔다리의 '운동이 많다'는 이유였다. 내겐 주위 간호사들이 쓰는 '운동이 많다'라는 표현이 기괴했다. (할머니가) 많이 움직이시는데 멍이 들거나 다칠 수 있어서요,와 같은 자연스런 말을 두고 마치 실험실의 기계장치를 설명하듯 '(손발의) 운동이 많으세요'라고 했다. 주어가 할머니(사람)가 아니라 운동(움직임)인 것이 많은 것을 설명하는 것 같았다. 그 손발의 움직임은 더이상 할머니의 의도나 고통, 표현 등과 연결되어있지 않았다. 늙은 몸에 갇혀 움직일 수도 소리를 낼 수도 없는 할머니, 기계적으로 말하고 움직이는 간호사들, 그리고 그냥 어쩔 줄을 모르는 할머니의 아들, 며느리, 손자들까지. 그 광경이 너무나 비참해서 숨이 막혔다.

 며칠째 갈비, 삼겹살같은 게 먹고싶던 참이었는데 요양원을 나서면서는 그 식욕이 왠지 야만적이라고 생각...하면서 기어코 고기를 찾아 먹었다. 잘 모르겠는 무엇엔가 항의하는 마음으로 벌건 생고기를 불판에 올려 치덕치덕 익히고 이로 자근자근 씹어 삼켰다. 그리고는 남자친구에게 달려가 온몸 구석구석을 만지고 껴안고 울었다. 그 울음은 사실 또 다른 많은 것들의 합창이지만 일단은, 적당히 뒤섞인 채로 두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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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교무실 선생님들이 담배 피우러 가자시는데 

여친이 넘 예뻐서 끊었습니다! 라고 했어요 ㅋㅋ 

말해 놓고 내가 기분 좋아...


(지금 교무실에 선언했는데 여기 생활지도부라 

흡연 측정기랑 ㅋㅋㅋ거짓말 탐지기 있어요 

담배 걸리면 내 돈으로 회식하기로 ㅋㅋㅋㅋㅋㅋ 아으)


당신 기다리는 거 좋아요 

기다리면 오잖아요 

처음 느끼는 기분이에요 

@@씨가 나한테 엄청 특별한 사람인가봐요 

기다리는 시간 동안 점점 커져요 내 마음 속에서


아침에 황홀하게 예쁘던데 언제 그 모습 또 보여 줄래요?




9/21 오전의 기록. 


 우울만 토해낼 것이 아니라 좋은 마음도 남기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어색한 말이지만 요새는 틈틈이 행복하다. 어디서든 벽에 힘없이 기대서지 않고, 몸을 똑바로 펴고 머리를 가눌 기운이 생겼다. 어깨를 내리고 배를 단단히, 뒤통수는 뒤로 당기면 뭐든 맞닥뜨릴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 직장은 노답이고 유학은 까마득한데다 돈 때문에 생활고에 시달릴 지경이지만 아니야, 괜찮아. 난 헤쳐나갈 수 있어. 그런 믿음이 솔솔. 아무 여파 없이 약을 끊은지 꽤 오래됐다.


 착하고 섹시한 사람이다. 마음껏 받으라며 내게 쏟아주는 마음이 진짜구나 믿기기 시작하면서 하루에도 몇번씩이나 뭉클하다. 엉망이었던 집을 하루 밤새 놀라울만치 깔끔히 치우고, 스쳐가며 한 번 언급했던 맥주와 동네에서 제일 맛있는 파이를 냉장고에 채워놓고 나를 기다린 모습을 상상하니 마음이 녹았다. 기다리는 마음이 좋을 수 있고, 그걸 표현할 수 있다는 게 거리 둘 줄만 알았던 내겐 낯선 일이었다. 어디든 입술 닿는 곳에 마음이 전해지는 것도 처음이었다. 품에 가두고 부드럽게 뜯는 기타도 쿵쿵쿵쿵, 자신있게 누르는 건반도 아주 달았다. 


 화장하지 않아도, 차려입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기분이다. 내게 있는 우울이 언젠가 도지더라도 자길 너무 멀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 기다릴 테니 숨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 나만 정신차리면 된다. 불안한 마음 다스리느라 홀로 보내는 시간에도 내게 와닿는 말들을 차곡차곡 쓰는 고마운 사람이니까.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이 꽉 차서 말문이 막힌다. 덜컥 자버린 것도, 덥썩 좋아진 것도 신기하게 다 내게 '맞는' 일, 옳은 방향이라는 느낌이다. 어린 나이가 아닌데도 신기하게, 모든게 처음이고 생생한 연애를 하고 있다. 나의 행복은 아주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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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1 14:14 - oui?

Two Studies for a Self-Portrait, Francis Bacon



출근길, 매번 똑같은 시간에 집을 나선다. 100분 정도를 졸다가, 걷다가, 무료해하다가 사무실에 도착. 매일 아침 일곱시에 일어나서부터 사무실을 나서는 일곱시까지는 무려 열두시간이다. 매일 온종일을 똑같은 곳에서 소비하는게 기괴하게 느껴진다. 도대체 내 삶은 언제 살라는 말이지.


점심시간. 밥 생각도 없고 운동도 안 내켰다. 과자 하나 까먹고 잠이나 잘 생각으로 소파 근처를 기웃거렸는데 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책상에 앉아, 뜬금없이 떠오른 모네의 Le Havre 그림들을 찾아봤다. 스크롤을 천천히 내리다 찔끔 울었다. 무기력하고 싫다. 엉망진창이다.


오후엔 꼭대기 층에 올라가 마사지를 받았다. 여기선 근육을 누르는 느낌이 아니고 생소하게, 뼈 위에 붙은 것들을 흔들흔들 미는 느낌. 계속 도가니가 생각나다가 나중엔 간지러웠다. 몸이 자꾸 움찔거려서 부끄러웠다. 목 뒤로 내 머리카락을 서툴게 쓸어 넘기는 손짓에서 여기 다시 오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느낌-가다. 느낌-가득하다. 느낌-갑갑하다. 느낌-강하다. 느낌-거칠다. 느낌-견고하다. 느낌-과하다. 느낌-괜찮다. 느낌-구겨지다. 느낌-길다. 느낌-깊다. 느낌-까칠하다. 느낌-깨끗하다. 느낌-끌리다. 느낌-끼다. 느낌-나다. 꼿꼿이 앉아 정제되지 않은 엔트리를 멍하니 읽는데 왠지 느낌-야하다.


해가 지고 느지막이 도착한 동아리 OB 술자리엔, 내 맞은편에 앉아 입은 남들을 따라 웃지만 굳은 눈으로 홀낏홀낏 내 눈치만 살피는 사람이 있었다. 지난 봄, 술에 곯아떨어진 나를 밤새 못살게 굴었던 더러운 새끼. 떨리는 손으로 내게 따르는 술을 비웃는 마음으로 연거푸 들이켰다.


우습다. 화도 나지 않고 우울하지도 않다. 마음은 무감각한데 이상하게 몸이 과민했다. 홍대의 요란한 불빛, 텁텁한 바람, 사람들의 말소리, 거리에 섞인 음식, 쓰레기 냄새 등 온갖 자극이 몸을 만지는 것 같았다. 혼자 처음 가는 바에 들어가 앉았다. 천천히 세 잔을 마셨다. 


기쁨이, 초록이처럼 동화에 나올법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알게 됐다. 따뜻한 낯으로 내 자리를 마련해주고, 술과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우울병 환자예요, 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마티니를 안주삼아 진을 마셨다. 술로 입을 막았다.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누구든 금방 좋아하게 될 것 같아서, 기억을 더듬어 보고 싶지 않았다. 숙취는 없는데 오래도록 술이 깨질 않았다. 아, 덥썩 좋아하게 될 것만 같아서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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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에 커피를 쏟았다. 그나마 카펫에 흘리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려던 찰나 책상 유리 상판 아래로 커피가 흘러 들어갔다는 걸 깨달았다. 검색해보니 유리를 들어내고 닦는 것 밖에는 답이 없다는데, 사무실에서 컴퓨터와 각종 집기를 다 내려놓는 행동이 너무 튈 것 같아서 가만있는 중이다. 아... ㄴ메야쟈바니캐티재내내냐냐ㅑ빠ㅏㅏ

친구는 Korean zombie workforce의 일원이 된 기분이 어떻냐고 묻지만, 내가 맡은 일은 아주 사소하고 적다. 그저께는 회사에서 이용할 수 있는 복지가 무엇인지 아주 꼼꼼히 검색하며 오후 시간을 보냈고(일단 통신비 지원을 받아 핸드폰을 바꿨다. 내년 봄에는 어학 시험 지원비로 DALF를 볼 생각이다), 어제는 집에서 가져온 맥 키보드를 회사 윈도우 컴퓨터에 연결해 키 매핑을 하는 걸로 두어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오늘은 출근하자마자 헬스장으로 올라가 뜨거운 물로 샤워했다. 다음주부턴 일인용 소파, 흔들 의자에서 낮잠을 자도 될 것 같다. 아닌게 아니라 사무실, 빌딩의 환경이 굉장히 좋다. 인터넷에서 종종 올라오는 IT 회사처럼 곳곳에 쉼터가 있고 쾌적하다. 열 발자국 거리에 온갖 간식거리가 가득 차있는 캐비넷과 네스프레소 커피 머신이 있다. 반바지에 슬리퍼차림, 통근버스를 타고 출근해 아침 에스프레소를 양껏 마시고, 쉬엄쉬엄 일하는 중간에 개인적인 자료조사를 하다 여섯시 반에 헬스장에서 운동을 한다. 8시께부터는 널찍한 카페테리아에서 공부. 월급이 거지같으니 주는 만큼만 일하고, 누릴 수 있는 건 다 누리겠단 마음이다.

이미 입사전에 연봉 협상과정에서 빈정이 잔뜩 상했었는데, 들어와서는 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간에도 연봉이 천차만별이라는 것. 같은 직무, 직위라도 이전 회사에서의 연봉을 기준으로 조금 올려주는게 회사의 방식이라서, 스타트업에서 일하다 온 사람의 경우는 여전히 쥐꼬리만한, 대기업에서 일하다 온 사람은 두둑한 연봉 오퍼를 받는다고 한다. 말은 '오퍼'지만 여기에 협상의 여지는 없다. 알바로 일하던 출판사에서 일여년간 급여를 받은 기록이 있는 나는, 그때의 급여수준이 기준이 되었을 거라고 한다. 번듯한 대기업에 다니게 되었지만, 사실 받는 돈은 작은 소기업에서 일하는 것보다도 나을 것이 없다. 

입사전, 큰 무역 회사의 외국인 임원 통역직을 두고 끝까지 고민을 많이 했다. 연봉이 1500만원 가량 높았고, 포멀한 환경에서 영어를 계속 쓴다는 것도 학회 발표와 유학 인터뷰를 앞둔 내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단점이라면 소속이 대기업이 아닌 파견직이라는 것과 강한 업무강도, 보수적인 기업문화. 실없는 이야기지만 매일 정장에 높은 구두를 신고 뭔가 차가운 도시의 '커리어 우먼'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나는 생계를 꾸려야 할 만큼 돈이 필요한 건 아니니, 연봉과 겉멋으로 선택할 순 없다는 생각에 이곳을 선택했다. 그치만 쥐꼬리같은 급여는 자존감에 상처가 되어서 흐려지질 않는다. 2주가 된 지금도 기분이 오르락 내리락한다. 직급이 모두 통일되어있는 수평적 구조인데도, 제일 하위 계급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자주 가는 술집의 이벤트 박스에 괜시리 당당하게 명함을 넣었다. 둥글고 예쁜 명함이 톡 떨어지는 순간이 눈에 오래 남았다. 나무 창틀 위에 놓인 투명하고 예쁜 유리 상자. 향긋한 초의 불빛을 쐬고있는 상자 안의 번듯한 명함들. 아니, 아니야, 이건 아니야, 이렇게는 아무것도 안돼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생각없이 멋있는 사무실을 쏘아다니며 시간을 흘려보내면 안돼, 흡족하게 웃을 일이 아니야, 라는 생각. 열등감을 그런식으로 다루면 안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길을 찾아야하는데, 나는 아무 것에도 전념하지 않고 있다. 연구계획서, GRE는 커녕 토플도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로 하버드, MIT와 같은 탑 연구실만 골라 인터넷 쇼핑하듯 장바구니에 담고있다. 일을 계속 하든 유학을 가든 지금의 경험을 잘 포장하려면 팀의 프로젝트 내용과 흐름을 파악하고 내 나름대로 정리해야 하는데 '내가 돈을 이만큼 받으면서 여기에 에너지를 쏟을 필요가 있나, 인력을 제공할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으로 시선을 돌리는 거다.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낼 수도 있는 일이고, 그래야 배우는 것이 있는 일인데 나는 아주 소극적으로 튜닝 작업만 하고 있다.


그치만 일단 오늘은 산책삼아 빌딩을 탐방하며 퇴근시간을 기다려야겠다. 프로그래밍을 공부해 볼걸, 내가 개발자였다면 어땠을까 등의 공상으로 도피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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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 두 시 반, 뛰는듯한 걸음으로 언덕을 올라오다 보니 얼마 전 본 맹수들의 사냥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생각났다. 들개 무리에게 추격당하는 물소가 자신은 아직 체력이 충분하다는 것을 과시하려, 달리는 와중에 쿵쿵 과한 점프를 하는 모습. 비슷하게, 팔다리를 휘저어가며 있는 힘껏 걷는 내 모습이 나는 취하지 않았다, 기운차다는 메세지를 담고 있는 것 같아서 우스꽝스러웠다. 그러다 곧 서글퍼졌다. 


 사치스러운 생활, 카드값을 감당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맡고 나니 귀가시간이 점점 늦어진다. 그룹 과외와 번역을 시작했고, 공동 프로젝트는 국제 학회를 앞두고 가장 바쁜 시점에 다다랐다. 게다가 졸업 논문의 본심이 며칠 남지 않은 이 와중에 주 5회 운동과 꾸준한 술자리를 고집하고 있다. 공부와 일, 여가 사이사이의 전환에 쓸 수 있는 시간이 없다. 무엇이 됐든, 뒤돌아 앉자마자 바로 주어진 과제에 몰입해야만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다. 잠깐 만났던 사람은 그래서 정리했다. 말과 행동이 맞지 않는 그 사람을 이해하려 애쓰는데 쓸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가 없었다. 처음 만나서 호감을 확인하고, 웃고, 대화하고, 자고, 설렘이 시드는 관계의 흥망성쇠가 순식간에 압축적으로 지나갔다. 


 가볍고 덧없기로 비슷한 관계가 앞뒤로 몇 번 더 되풀이되는 동안 초콜렛을 까먹는 기분이었다. 그냥 재미있었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지 않았고, 이해받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달콤하니 들뜨는 기분이 끊이지 않는다는 게 좋았는데 어제는 내 머리 위의 낯선 손, 그리고 조용히 해야 한다는 말에서 문득 환멸을 느꼈다. 이 말과 손이 분명한 반복이었는데, 어렴풋이 떠오르는 장면이 영화인지 꿈인지 잠깐 만났던 누군가인지 알 수 없었다. 환멸이 몸을 짓눌러서 말없이 숨만 몰아 내쉬었다. 그 후론 공사, 친소의 경계없이 모든 관계가 동물들의 사냥으로 보인다. 우습고 가소로우면서 측은하다. 아무것도 어렵진 않은데, 피로하다. 그 안에서 24시간 여자로 살고 있다. 내가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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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2 15:10 - o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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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0 13:57 - oui?



 논문을 내고 나면 일단 심사평이 나올 때까진 한가해진다. 관둘까, 정말 관두고 학위논문 과정만 해외에서 다시 할까 고민했지만 현실성이 없다는 걸 깨닫고 엇나가는 느낌으로 아무렇게나 논문을 해치웠다. 할 일이 눈덩이처럼 굴러오면서 배로 커질지는 모를 일이지만... 일은 그냥 일이고. 나는 의미와 방향을 잃은 느낌이다. 멍청ㅡ하게 살고있다. 유학 준비를 해야할 지, 플랜B를 준비해야 할 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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