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 선셋

일기

2013. 7. 11. 01:11




드라이브하는 기분이 꽤 좋았다. 서울 밖으로 나서본 적이 많이 없고, 운전을 할 줄도 몰라서 자유로같이 크고 한적한 길에 들어설 일이 거의 없었는데, 딱히 목적지 없이 차를 타고 달리는 기분이 생소했다. 날이 흐려서 시야의 도로도 하늘도 경계가 희미하게 모두 회색이었다. 


요새는 영장류와 구분되는 인간의 고유한 인지능력이 유아기에 어떻게 발달되는지에 대한 챕터를 읽고있다. 개념과 단계는 아주 세세하게 나뉘어져있고, 그에 딸린 실험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이렇게 길고 정교한 인지발달과정을 거쳐왔나하는 생각에 스스로가 대견하기까지 하다. 그중에서도 특히, 타인도 의도와 관점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이 나의 것과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굉장히 어렸을 때 깨닫는다고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참말인가하는 생각이 든다. 마음이 모두 다르게 생겼다는 그 사실은 알겠는데, 그 제각각 다른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다면 그게 무슨 소용일까, 하는...


요즈음은 부쩍 남들의 말에서 겉치레와 진심을 구별하는게 어렵다. 진심만 말을 해도 통하기가 어려운 마당에 마음에 없는 말은 대체 왜이렇게 많이 돌아다니는 걸까?




누군가 내게 일순간 스스로를 많이 내보였다고 해서, 내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해서, 그 사람과의 관계가 특별해지는 것은 아닌것은 사람들을 겪으며 깨달았다. 언제 멀어져도, 혹은 아예 끊어져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사람들이지만 가끔씩 만나 서로 편하게 속에 있는 것들을 나눌 수 있다면 그 나름대로 의미있는 만남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 순간들은 소중한 것이라고.


차에서는 바스크 민요와 개리 무어와 시마노프스키의 피아노곡들이 나왔다. 생소해서 듣기 좋은 음악들.




요새 혼란스러운 것은, 그때그때의 대화가 유의미했다고 생각하는것이 나만의 착각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얼마전 유독 굳은 표정과 쌀쌀한 말투가 밴 후배에게, 자기는 남자들에게는 항상 선을 정확하게 긋는다고 말하던 그 스무살 친구에게 나는 눈알을 굴리다 마침내 할 말을 찾아낸 적이 있다.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여지를 남기는 것과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은 다른 것 같다고, 어차피 '인간적' 매력과 '여성적' 매력은 구분해서 뽐낼 수 있는게 아니고 받아들이는 사람 마음인 것 같다고. 주위 사람들이 그 후배에 대해 말할 때에는 항상 하얗고 예쁜 얼굴을 먼저 꼽았기 때문에, 알 수 없던 그 쌀쌀맞음이 이해가 갔다. 그리고도 그 후배는 어장관리나 사람들의 험담에 대해서도 한참을 이야기했다. 나는 그렇게 성별이 남자인 사람들을 무조건 밀어내고 볼 필요는 없다고 여유를 조금 가져도 된다고 했던 것 같다. 그 친구는 눈물을 살짝 닦아낸다는 듯 눈가에 휴지를 갖다댔다. 


자리가 파하고, 내가 대화내용을 전하자 K는 그 상황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뭐야 진짜 별 말 안했네> 나는 a1, a2, a3...에 대해서 말했지만 K에게는 몽땅 다 같은 A로 들리는 듯 했다. 그리고선 K가 덧붙였다. 그 후배가 남자선배들에게 어색하리만치 딱딱하게 대하는 만큼, 반대로 여자선배들에게는 부자연스럽게 사근사근하게 대한다고. 확실히 그 후배는 평소 나의 시덥잖은 말에도 유독 격하게 동조하거나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내가 (지능적으로 돌려서 까는것인지 의심할만큼 되도않게) 예쁜 여배우를 닮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잠시나마 통했다고 생각했던 것은 나만의 환상이었을까? 별다른 대꾸없이 운전하던 X는 어차피 관계란 오해의 연속이라고 했다. 그리고선 시인과 촌장 노래를 틀었다. 처음부터 트랙을 넘겼던 것을 보면 <때>라는 곡으로 말을 대신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희뿌연 도로의 풍경은 신기하게도 그때그때 조금씩 달랐다. 트랙은 계속 넘어가다가 <좋은 나라>에 이르렀는데, 몇마디 듣기도 전에 눈물이 울컥 올라왔다. 내게는 한국적인 정서의 한이랄 것도, 노래에 얽힌 개인적인 사연도 없는데 담담한 그 곡이 그냥 슬펐다.




가슴 사이로 안전벨트가 달라붙는게 싫어서 내내 손으로 쥐고있던 벨트를 놓았다. 눈물을 닦느라고. 벨트가 가슴에 닿는 기분이 이상했다. 잠시두고 이 감촉이 이상할 이유는 뭘까 생각하는데 X가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오늘을 두고 <둘이 헤이리에 갔다왔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나는 너를 만난적이 없는 것일 수도 있다고. 소통 불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동시에 오늘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일까? 또 길을 잃은 기분. 같은 채널안에서도 주파수를 맞추기는 이렇게나 어렵다.




Philip Roth: The fact remains that getting people right is not what living is all about anyway. It's getting them wrong that is living, getting them wrong and wrong and wrong and then, on careful reconsideration, getting them wrong again.




집에 돌아와서 컴퓨터를 켰다. 페이스북에는 소중한 누구누구와 만남, 누구누구와 오랜만에 힐링타임, 같은 말들이 떠돈다. 하트뿅뿅 이모티콘 뿅뿅. 카톡에는 오랜만에 안부를 묻는사람,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 귀찮은 부탁을 하는 사람, 말 한마디 없이 사진만 잔뜩 보내놓은 사람, 첫출근이야기로 시끄러운 단체톡방... 나는 적당한 말들을 찾기가 어려웠다. intersubjectivity, intentionality of others(, and the ability to understand them both), false belief 등에 관한 개념들을 이해했지만 중요한건 현실은 실험처럼 한정된 변수와 조건을 가지고 있는 통제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막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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