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유리 상판에 흘러들어간 커피 이야기

일기

2016. 8. 12. 17:41



책상에 커피를 쏟았다. 그나마 카펫에 흘리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려던 찰나 책상 유리 상판 아래로 커피가 흘러 들어갔다는 걸 깨달았다. 검색해보니 유리를 들어내고 닦는 것 밖에는 답이 없다는데, 사무실에서 컴퓨터와 각종 집기를 다 내려놓는 행동이 너무 튈 것 같아서 가만있는 중이다. 아... ㄴ메야쟈바니캐티재내내냐냐ㅑ빠ㅏㅏ

친구는 Korean zombie workforce의 일원이 된 기분이 어떻냐고 묻지만, 내가 맡은 일은 아주 사소하고 적다. 그저께는 회사에서 이용할 수 있는 복지가 무엇인지 아주 꼼꼼히 검색하며 오후 시간을 보냈고(일단 통신비 지원을 받아 핸드폰을 바꿨다. 내년 봄에는 어학 시험 지원비로 DALF를 볼 생각이다), 어제는 집에서 가져온 맥 키보드를 회사 윈도우 컴퓨터에 연결해 키 매핑을 하는 걸로 두어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오늘은 출근하자마자 헬스장으로 올라가 뜨거운 물로 샤워했다. 다음주부턴 일인용 소파, 흔들 의자에서 낮잠을 자도 될 것 같다. 아닌게 아니라 사무실, 빌딩의 환경이 굉장히 좋다. 인터넷에서 종종 올라오는 IT 회사처럼 곳곳에 쉼터가 있고 쾌적하다. 열 발자국 거리에 온갖 간식거리가 가득 차있는 캐비넷과 네스프레소 커피 머신이 있다. 반바지에 슬리퍼차림, 통근버스를 타고 출근해 아침 에스프레소를 양껏 마시고, 쉬엄쉬엄 일하는 중간에 개인적인 자료조사를 하다 여섯시 반에 헬스장에서 운동을 한다. 8시께부터는 널찍한 카페테리아에서 공부. 월급이 거지같으니 주는 만큼만 일하고, 누릴 수 있는 건 다 누리겠단 마음이다.

이미 입사전에 연봉 협상과정에서 빈정이 잔뜩 상했었는데, 들어와서는 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간에도 연봉이 천차만별이라는 것. 같은 직무, 직위라도 이전 회사에서의 연봉을 기준으로 조금 올려주는게 회사의 방식이라서, 스타트업에서 일하다 온 사람의 경우는 여전히 쥐꼬리만한, 대기업에서 일하다 온 사람은 두둑한 연봉 오퍼를 받는다고 한다. 말은 '오퍼'지만 여기에 협상의 여지는 없다. 알바로 일하던 출판사에서 일여년간 급여를 받은 기록이 있는 나는, 그때의 급여수준이 기준이 되었을 거라고 한다. 번듯한 대기업에 다니게 되었지만, 사실 받는 돈은 작은 소기업에서 일하는 것보다도 나을 것이 없다. 

입사전, 큰 무역 회사의 외국인 임원 통역직을 두고 끝까지 고민을 많이 했다. 연봉이 1500만원 가량 높았고, 포멀한 환경에서 영어를 계속 쓴다는 것도 학회 발표와 유학 인터뷰를 앞둔 내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단점이라면 소속이 대기업이 아닌 파견직이라는 것과 강한 업무강도, 보수적인 기업문화. 실없는 이야기지만 매일 정장에 높은 구두를 신고 뭔가 차가운 도시의 '커리어 우먼'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나는 생계를 꾸려야 할 만큼 돈이 필요한 건 아니니, 연봉과 겉멋으로 선택할 순 없다는 생각에 이곳을 선택했다. 그치만 쥐꼬리같은 급여는 자존감에 상처가 되어서 흐려지질 않는다. 2주가 된 지금도 기분이 오르락 내리락한다. 직급이 모두 통일되어있는 수평적 구조인데도, 제일 하위 계급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자주 가는 술집의 이벤트 박스에 괜시리 당당하게 명함을 넣었다. 둥글고 예쁜 명함이 톡 떨어지는 순간이 눈에 오래 남았다. 나무 창틀 위에 놓인 투명하고 예쁜 유리 상자. 향긋한 초의 불빛을 쐬고있는 상자 안의 번듯한 명함들. 아니, 아니야, 이건 아니야, 이렇게는 아무것도 안돼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생각없이 멋있는 사무실을 쏘아다니며 시간을 흘려보내면 안돼, 흡족하게 웃을 일이 아니야, 라는 생각. 열등감을 그런식으로 다루면 안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길을 찾아야하는데, 나는 아무 것에도 전념하지 않고 있다. 연구계획서, GRE는 커녕 토플도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로 하버드, MIT와 같은 탑 연구실만 골라 인터넷 쇼핑하듯 장바구니에 담고있다. 일을 계속 하든 유학을 가든 지금의 경험을 잘 포장하려면 팀의 프로젝트 내용과 흐름을 파악하고 내 나름대로 정리해야 하는데 '내가 돈을 이만큼 받으면서 여기에 에너지를 쏟을 필요가 있나, 인력을 제공할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으로 시선을 돌리는 거다.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낼 수도 있는 일이고, 그래야 배우는 것이 있는 일인데 나는 아주 소극적으로 튜닝 작업만 하고 있다.


그치만 일단 오늘은 산책삼아 빌딩을 탐방하며 퇴근시간을 기다려야겠다. 프로그래밍을 공부해 볼걸, 내가 개발자였다면 어땠을까 등의 공상으로 도피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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