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rred lines

일기

2013. 11. 10. 19:26


나는 그냥, 그래도 밀가루 음식이 인스턴트보다는 낫지 않냐고 한마디 했을 뿐인데 밀가루가 얼마나 몸에 해로운지에 대해 신경질적인 주장을 들어야했다. 말은 도대체 끝날줄을 몰랐고, 나는 사람이 어떻게 밀가루에 대한 증오를 저렇게까지 길고 집요하게 표현할 수 있는지가 우스워서 한순간 푸하고 웃었다.


너는 정말 사람을 기분나쁘게 하는 재주가 있어.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감정이 격해지다보면 말에 화가 담길수는 있지만 오로지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서 고른 말들을 내뱉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들어서, 뭐가 그렇게 약이 올라서 나를 동요하게 만들고 싶었던 걸까. 애매한 시간에 찍혀있던 부재중 전화 7통... 왜 전화를 안받았는지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지 않아서? 혹은 왜 7통이나 전화를 걸었는지 묻지 않아서?


하지만 오늘은 누구와도 만나고 싶지도, 말하고 싶지도 않다는 말을 했어봐야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었을까? 별다른 일이 있는게 아니고, 누구에게 화가 난 것도 아니라고 길게 설명할 여유도 없었고, 설명한들 그런 상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때로는 혼자 있는게 더 편하다는 말을 꾹 참느라 부들부들 떨고싶지 않았다.




그게 아니면... 그사람이 찡그리며 '문제적'이라고 평한 노래를 내가 아랑곳하지 않고 며칠째 신나게 듣고 있어서? 여성을 노골적으로 성적 대상화하는 것이라는 주장에 내가 아주 조금도 동의하지 않아서? 그에 대해서도: 나는 왜 그걸 사회적인 발언으로 봐야하냐고, 남여사이의 가장 사적인 시간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과 표현일 수 있지 않냐고 말했다. 미디어의 영향력과 잘못된 성 인식, 사회정치적 책임 등등의 이런저런 말을 들었지만 사실 그사람에게 중요한건 그 곡이 아니고 그 곡을 받아들이는 내 태도였단 느낌을 받았다. 나름의 상상과 불안을 자극했던 모양이지만 스스로 말하지 않는 것까지 내가 끌어내어 안심시켜주고 싶지는 았았다. 무엇보다 그 불안의 내용은 모순적이게도 다른 어떤 하나의 성적 고정관념("정숙한")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요새는 문득문득 내 생각을 곱씹어볼때마다 나답지가 않아서ㅡ 이만큼 낯이 설다. 나이가 드는것인지 하는 생각마저도 지워버릴만큼 사랑에 푹 빠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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