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속에 맺혀서

일기

2014. 3. 9. 17:32





열시 반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울려서 일어났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까만 옷을 고르다가, 잠깐 울다가, 여기저기 전화를 걸다가 받다가. 택시를 타고 나서도 왠지 장난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언니가 관심과 애정에 목마르다 삐뚤어져서, 자기가 죽었다고 연락하면 누가 바로 오는지 보려던건 아닐까? 그럼 정색하고 화를 내야 되나... 따뜻한 말로 다독여 줘야되나... 하릴 없이 만지작거린 핸드폰에는 손가락을 두어번만 움직여도 뜬금없는 퀴즈를 보내온 이틀 전의 카톡창과 나흘 전의 통화 기록창과 같이 먹은 음식의 사진들이 떴다. 


그래봐야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장례나 화장이나 모두 산 사람을 위한 식일텐데. 그 식의 공간과 절차가 죽은 사람의 마지막 인상이 되는게 묘했다. 그 연화장이 허름침침했어서, 관을 옮기고 유골을 담는 사람들의 몸짓이 투박했어서. 죽음이라는... 이미 추상적인 개념을 다루는 식인데 오히려 아주 물리적이고 구체적인 것들에서 그 질적인 수준이 드러난다는 것이 서글펐다. 별로 침통해보이지 않는 누군가는 저기 저 항아리는 무슨 이백만원이야, 아니 만드는데 이만원이나 들었을라나? 같은 말을 속닥이기도 했다. 


모두가 합심해 희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그 며칠간의 분위기는 블랙코메디라고 밖에 할 수가 없다. 만의사 극락왕생전에는 위패도 유골함도 없이 임시 스티커 한 장, 예쁜 영정사진 한 장... 일요일에는 절도 쉬는 날이라 어쩔 수가 없다고 했다. 게다가 동행한 누구도 이 언니의 취향을 몰랐다. 소식 듣자마자 열 일 제치고 달려오는 사람들인데도 담배, 술, 커피, 책, 음악, 소품 할 것 없이 그야말로 아-무-것-도. 급조한 초콜렛과 담배와 술 한 병을 올려놓고 우리는 어설프게 절을 했다. 그리고는 마치 오랜만에 모인 것이 반가운 마음 하나만 있는 사람들처럼 웃으며 고기와 술을 먹다 헤어졌다. 


한 달이 지나서야 겨우 반짝이는 악세사리와 이상의 시집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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