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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2015. 12. 26. 21:38

오늘도 하루종일 집에 있었다.




나보코프: 

 "나는 거리를 두고 나 자신을 바라보는 데, 스스로의 모델이 되는 데 몹시 익숙해져 버렸다. 바로 그 까닭에 내 문체는 꾸밈없는 자연스러움의 은총을 잃어버렸다. 나는 이제 도무지 원래의 내 껍질 속으로 돌아가서 옛 자아 안에 편안히 기거할 수 없다. 그곳은 엉망이 돼버렸다. 가구는 재배치 되었고, 램프는 다 타서 꺼져버렸다. 내 과거가 산산조각 나버린 것이다."


심리평가보고서:

 "사고상에서, 사고의 생산성은 풍부한 상태임(R=20). 현재 내적인 사고가 매우 복잡한 상태로 여겨지고 있으나 사고처리의 노력이나 효율성은 다소 저하되어 있어 외부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거나 해결책을 생각해내는 데 다소 어려움이 있겠음. 관습적인 사고는 비교적 유지되고 있어 보이지만, 외부 자극을 다소 작위적으로 해석하거나 오해석할 가능성이 증가되어 있겠음.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큰 갈등이 경험되어 있지 않아 보이며 긍정적인 관계경험이 보고되고 있음. 하지만 현재 주변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점도 관찰되며,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 예민한 모습을 보이고 있음(Pa 예민성=69T). 이를 내색하지 않고 겉으로는 친근하고 밝은 모습으로 대처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겠음. 타인과의 관계에서 다소 거리감을 두고 있을 것으로 예상되며, 스스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내비치기 어려워 하고 있어 보임(I. 입을 가려놓은 호박 램프 ...)."


엄마의 육아일기:

 "그러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어쩜 저렇게 어렸을 때랑 똑같을까 신기하다. 다섯살 때였나, <개미와 배짱이> 그림책을 잠자리에서 읽어주다가 애가 울음을 터뜨린 일이 있었다. 그 이야기에서 배짱이처럼 놀지만 말고 개미처럼 열심히 일(공부)해야 한다는 '교훈'을 못 알아듣는 아이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는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도대체 뭐가 슬픈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애를 달래면서 물어보니 아이는 개미가 너무하다고 화를 냈고, 베짱이가 불쌍하다면서 계속 울었다. ... 그림책의 글이 아니라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진짜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운 겨울날 헐벗은 배짱이가 개미에게 쫓겨나서 눈보라치는 벌판을 혼자 걸어가는 두 페이지에 걸친 어두운 그림이 글을 모르는 아이에게는 충분히 비극적으로 다가가고도 남을 것 같았다."


인생 최초의 연애편지:

 "하이~ 나 형 석 이야. 너 모 하 고 있 어? 궁 금 하 다 내가 편 지 쓰 는 이유는 내 가 너 한 테 할 말 이 있 어 서 야 모 냐 면 널 예 전 부 터 좋 아 했 어 그리고 편지쓰는 건 처음이야 글 구 당 황 스 럽 겠 지 만 답 장 써죠. 꼭 -형 석 이 가-

(쉬는 시간이 끝나고 교실로 돌아오니 친구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 가방에 쟤가 편지를 넣는 걸 봤다고 했다. 장난일까, 혹시 욕은 아닐까, 진짜 고백일까, 진짜?하고 하루종일 기대에 부풀어있다가 집에 돌어오자마자 편지를 열어 본 순간은 아직도 생생하다.)


고등학교 성적표:

 문학: 81 국사: 56 사회문화: 87 수학1: 71 생활과과학: 72 체육: 97 미술: 95 프랑스어독해: 86 프랑스어회화: 97 영어독해1: 88 영어독해2: 85 영어회화2: 98 중국어1: 56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그냥 무난해보이지만 석차를 보면 꼴지 수준을 벗어난 과목은 절반밖에 안된다. 이 때는 심장이 너무 뛰어서 성적표를 펼쳐보는 것도, 그 안의 숫자를 똑바로 읽기도 힘들었는데 10년이 지나니 정말 아무렇지 않아지는구나. 내 주위의 하위 10%들, 걔들도 숫자가 아니고 사람이었을 텐데, 같은 교실에서 꼬박 3년을 같이 보낸 반 친구들 중 누군가였을텐데. 어떻게 견뎠으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


잉게보르크 바하만: 

 "내 육신에 기거하고 있는 정신은 그것의 거짓 주인보다 한결 위대한 사기꾼이다. 정신에 정면으로 마주치는 일을 나는 무엇보다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 어느 것이나 나 자신과 상관없기 때문이다. 개개의 사상이란 한결같이 낯선 데서 얻어 온 씨앗이 발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를 감동시킨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나는 생각할 능력이 없다. 그런가하면 감동하지도 않았던 유의 사물들에 관해서나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생각을 한다. 또한 혼자 아무런 목표도 없이, 이것저것 몇 가지 카테고리를 생각한다. 그리고 아마도 한 번쯤은 그 규칙을 바꿔보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희란 바뀌지 않는다. 결코 변경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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