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밤의 모험

일기

2015. 12. 6. 21:47



 놀고는 싶은데 곰곰히 따져봐도 만나고 싶은 사람이 없어서 한참 이 동네 저 동네 떠돌다가 조용해 보이는 이자카야에 혼자 들어갔다. 집을 나설 땐 시카블랙이라는 술을 마셔보고 영화 시카리오를 볼 계획이었는데, 시카블랙은 마침 떨어졌다고 해서 비잔클리어를 시켰다. '시카'라는 리듬이 깨졌으니 굳이 험한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이럴 땐 정말 내가 어디 좀 이상한 노처녀 같다. 술집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테이블은 서너 개에 바에 자리가 대여섯 개 정도... 주문한 술에 어울리는 걸로 적당히 꼬치를 챙겨 준다던 주방 직원은 점잖고 친절했는데, 꼬치가 맛이 별로였다. 그래서 꼬치 아래에 깔려있던 양상추와 기본 안주로 챙겨준 신기한 두부만 부지런히 먹었다. 메뉴판과 술병 앞뒤로 적힌 글자를 읽으면서 한잔, 꼬치를 한 입씩 맛보면서 한잔 하다 보니 아무 것도 안 했는데 시간이 금방 갔다. 생각보다 혼자 술 먹는 건 뻘쭘하지 않았다. 옆에선 바 직원이 양복 입은 아저씨들에게 살갑게 말을 붙이고 있었는데 그 시답잖은 대화를 듣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술은 사케 특유의 향긋한 소다향?에 무미에 가까운 깔끔한 맛이었다. 생각보다 술이 빨리 오르는 것만 빼면 모든 게 괜찮았다. 


 금요일... 사흘 동안 16시간씩 자고 두문불출하며 과자만 먹다가, 그래도 금요일 저녁이니까 나와봤다. 어쩐지 오늘만큼은 남자를 부르기가 싫었다. 요새는 이상하게 상대의 성별에 과민하게 된다. 분명 얼마 전까지는 텔레토비처럼 하하호호 지냈었는데, 이제는 그렇게 웃고 놀 자신이 없었다. 뭐라 꼬집어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깨달았는데, 아직은 잘 표현할 수 없지만 어쨌건 중요한 건 주위 사람이라고는 이성밖에 없고 우리는 친구가 아니었다는 거다. 내가 생각해온 것처럼 성의 구분이 없이 어떻게 어떻게 긴 시간 다져온 인간관계에서 맺어진 유대... 그런건 그냥 내 희망사항이었다. 자기기만인지 환상인지. 남 탓을 하려는 건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확실히 이성으로 보이기 시작했고, 또 내가 하는 모든 말, 말투, 행동들이 상대방의 호감을 사기 위해 꾸며져 있다는 것도 느꼈다. 병신같고 털털한 코드를 깔아놓은 와중에 섹스어필을 하는 교묘함?에 기가 찼다. 아무것도 의도하진 않았지만, 이런 행동양식을 가진 내가 싫었다. 지난 두 달간 세어보진 않았는데 몇몇 사람들이 뜬금없이 선을 넘어왔다. 진지한 고백도 있고 가벼운 스킨십도 있고. 술을 마시고 신나는 기분, 그리고 상대방의 웃음이나 웃음기 있는 눈빛이 좋았을 뿐이라고 변명하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많았다. 일단 나는 이런 데에 신경 쓸 때가 아니기 때문에 그냥 최대한 아무도 만나지 않기로 했다. 사실은 생각하기도 싫고 귀찮았다. 근데 좀 허탈한 건 이렇게 따지고보니 진짜 만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결벽이라고 말해주면 좋았겠지만, 그런 종류의 진단을 할 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도 없었고 사실도 아니었다. 그나마 평판이 소문이 안 좋은 게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할랬는데 조금 더 생각해보니 그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스무살 때, 동아리의 언니들이 나를 싫어했다는 것도 나는 졸업할 즈음에야 알았다. 아... 정말 답이 없다. 술은 얼마 마시지 않았는데 취기가 오르고 얼굴이 붉어졌다. 멀쩡한 꼴로 나가려면 여기서 멈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같아선 남은 술을 챙겨 나오고 싶었지만 이미 혼자 술 마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주책 맞은 것 같아서 '킵 해주세요' 할 수밖에 없었다. 68,500원, 한 시간 반 정도 홀로 시간을 보내는 데 이만큼을 소비했다. 집에 들어가긴 싫고, 술기운이 오르니 푸근한 영화관 의자에 앉아서 잠시나마 다른 세계를 구경하고 싶었다. 호기롭게 택시를 잡아타고 영화관으로 이동하면서 오후에 새로 산 립스틱의 포장을 뜯었다. 어두운 뒷좌석에서 새 립스틱의 매끈한 표면을 입가에 갖다 대니 어쩐지 무언가에 점점 집착해 추락하는 어떤 소설이나 영화의 인물이 된 것 같았다. 


 얼른 영화관의 그 푹신한 의자에 주저앉고 싶어서 급하게 걸어 엘레베이터를 탔다. 술 때문인지 살짝 정신이 없는데 미리 타 있던 사람인지, 뒤따라 탄 사람인지 아무튼 옆에서 대뜸 '헝거게임 보러 가세요?'라고 말을 걸어왔다. 아, 네... 포인트로 결제할 건데 두 장 살 수 있다며 표를 끊어 주겠다길래 괜찮다고 답했지만 엘레베이터에서 매표소까지는 좁고 한적한 길이라 어색하게 같이 걸어야 했고 매표소에 열려있는 창구도 달랑 하나였다. 카운터에 기댄 남자가 고개를 돌리며 E05, 06 어때요?, 하고 물었고 내가 '공짜 티켓인데!'와 '진짜 공짜인가?'사이에서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티켓이 나왔다. 아무 생각없이 얼떨떨하게 상영관에 들어갔는데, 나란히 좌석에 앉으니 그제야 걱정이 몰려왔다. 영화 시작 전 광고 속 유아인을 보다가는 대뜸 '저 유아인이랑 친해요' 라고, 또 곧 '이 시리즈 하나도 안 봤는데' 라고 말을 붙이던 이 사람은 불이 꺼지는 참에 '무서우면 손잡아도 되죠?'라고 던졌다. 파뜩 정전기가 오르는 것 같았다. 그냥 지하철 문짝에 붙어있는 훈훈한 시민들의 이야기와 같은 맥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뭐라도 기대하고 베푼 호의라는 게 그제야 느껴졌다. 영화에 집중되질 않았다. 영화가 끝나면 이미 열두 시가 넘은 시간일 텐데 커피든 뭐든 같이 마시고 싶지 않았고, 번호를 남기고 다음을 기약하기는 더더욱 싫었지만 생각 없이 신세를 져버렸으니 그냥 모른 척 집에 가려면 이래저래 불편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나름의 묘수를 찾은 것 같아서 아주 잠깐 뿌듯했다.


 심장이 뛰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호흡이 곤란해지거나 이상행동을 하진 않았지만 불안이 몰려왔다. 왜 하필 오늘인지, 남자를 안 만나려고 기를 쓰고 혼자 놀던 날인데 이게 무슨 영문인지 이해할 수 없었고, 술기운에 편하게 영화관에 앉아 기대하던 영화를 보려던 계획도 물 건너간 이 상황이 속상했다. 이 와중에 그 사람의 기분이 상했을까 봐 미안했다가, 혹시라도 따라 나올까 봐, 마주칠까 봐 무서웠다가, 표면적으로는 그냥 선의를 베푼 사람인데 머릿속으로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 같아 또 미안했다가, 술 냄새가 났나, 그래서 쉬워 보였나 생각하다가... 왜 나한테 계속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지만 막상 낯선 사람이 다가오면 무서운데 뭐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냥 성별은 덮어두고 대화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관계는 없는 건지 아주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경복궁에서부턴 내려서 마음도 가라앉힐겸 집까지 걷는데, 지난 여름 똑같이 영화관에서 만났던 사람이 보고싶었다. 이제껏 남녀관계가 지겹네 남자는 그만 만나야겠네 난리를 해놓고선 그 남자가 보고싶은 마음에 헛웃음이 났다ㅋㅋㅋㅋ... 같이 시간을 보내던 공원에 가볼까 했지만 이만큼 감상에 젖어 비련의 여주인공 같이 굴면 아무리 본 사람이 없다 한들 다음날 부끄러움에 괴로울 것 같아서 그냥 집에 들어왔다. (only unfinished love can be romantic이라지만 나는 자격미달이다. 내가 아직도 생각하는 걸 알면 기겁하겠지.)


 아무튼 연말에는 분위기에 취하지 않게 카페 하나 없는 조용한 시골에 내려가 논문을 써야겠다. 킵 해놓은 술은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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