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8일 토요일

일기

2013. 5. 19. 01:19


X, 나는 지금 명동의 카페에 들어와있어. 시끄러운 와중에도 지금 이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은게 참 다행스럽기만 해. 왜냐면 오는 길에 이상한 사람을 둘이나 만났기 때문이야. 그리고 뭐 애초에 명동에서 조용한 곳을 찾는다는게 말이 안되기도 하겠지?


청계천을 지나다가 도를 아십니까를 만났어. 덩치 큰 남자와 키가 작은 여자가 '시청이 혹시 여기서 먼가요?'라고 묻는데 찡그린 건 아닌데 이상하게 굳은 얼굴빛에서 사이비 종교인의 분위기가 풍기더라. 나는 최대한 성의없이 직진해서 큰 길 나오면 좌회전하세요, 하고 고개를 돌렸는데 그 남자가 내 앞을 막아섰어. '저 얼마쯤 걸리나요? 저기 혹시...' 잘 모르겠다고하고 걷기 시작하는데 기분이 많이 상했어. 내 앞을 막아서, 옷깃을 잡을 듯 손을 내밀어서 놀란 것도 있는데, 그냥. 그 사람들 특유의 분위기가 너무 싫었어. 어딘가 얼이 빠져있으면서도 집요한 구석이 있는 분위기. 이상한... 맹목적인 믿음에 사로잡힌 사람들...


이어폰을 꽂고 길을 걸으면서 생각했어. 다음부터는 또 이러면 불어로 한국말 못해요, 죄송해요, 같은 말들을 빠르게 늘어놓기로. 그렇게 곧 영화관에 도착했는데, 영화표를 끊고 지갑을 정리하려고 의자에 앉았는데, 새치머리가 한가득인 여자가 말을 걸더라. '언니, 전화 한통화만 써도 돼요?' 이상하게 반짝이는 (번뜩이는?) 눈에 때아닌 겨울 옷차림 때문에 겁이 났어. 아무리봐도 영화보러 온 사람같지는 않았거든. 핸드폰을 빌리고서는 냅다 뛰어 도망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떠올라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죄송해요, 저 통화를 다 써서,라고 되도않는 변명을 했어. 말해놓고 이 변명의 궁색함에 너무 창피했어. 그런데 그 여자는 잠깐이면 된다고 내 옆에 털썩 앉더라. 핸드폰을 내가 건네줬는지는 기억이 안나. 앉자마자 풍기는 엄청난 악취에 숨이 막혔거든. 그 여자는 공일공 삼일... 소리를 내면서 번호를 누르는데 손톱의 흰부분이 분홍색부분만큼 길었어. 그런탓에 번호도 힘겹게 누르더라고. 나는 여전히 이 사람이 갑자기 일어나 뛰어나가진 않을까 불안해서 하는 수 없이 최대한 가까이 앉아있었어. 언제고 손뻗으면 붙잡을 수 있게. 안받는 듯 하던 전화는 연결이 됐는지 여자가 말하기 시작했어. 


'오빠 어디야? 나 영화관이잖아'하면서 시작한 말은 돈이없다-우산도 없다-언제 올거냐-나 배고프다-로 이어지는 동안 고함이 됐어. 때가 잔뜩 낀 얼굴에 영락없는 노숙자스타일로 산발을 한 여자가 내 옆에 붙어앉아 소리를 지르니 사람들이 날 쳐다보더라. 기분이 나쁘기도 전에 우선 곤란했어. 이 사람이 화를 못이기고 내 핸드폰을 집어던지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 시작할 때쯤 다행히 통화는 끝이 났어. 핸드폰도 순순히 돌려받고. 황급히 자리를 뜨려는데 이 사람이 내 팔을 잡으면서 말을 걸었어. 가까이 오는 순간 그 악취때문에 정말 어지러웠어. 나보고 몇살이냐고, 이야기 좀 할 수 있냬. 죄송하다고, 친구 만나러 가야한다니까 친구가 올 때 까지면 된대. 말로는 어림없을 것 같아서 그냥 도망가려는데 우산에 가방에 지갑에 물병에 핸드폰에 챙겨야되는건 왜이리 많은지, 그 와중에 내 팔을 잡은 손의 힘이 꽤 쎄기도 하고해서... 눈물이 눈알 뒤로 들어차는 것 같기도 했어. 그사람이 '떡볶이 천원어치'까지 말하는 동안 핸드폰 통화목록을 키고 손가는대로 아무 이름이나 급하게 누르며 일어섰어. '여보세요?' '어 야 나, 너 있잖아 아... 지금.... 어...' 하는데 난 왜 단호히 말도 못하고 (해봐야 끌려다니고) 빠져나오는 연기도 못하는지, 자괴감이 밀려오더라. 전화를 받은 친구에게도 제대로 설명도 못하고 어버버버하다 끊었어. 가슴은 계속 두근거리고. 겁이 날 때 전화를 할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라는 생각도 들고. 그래도 왜, 역시 안호구네, 하면서 작게 웃는 목소리가 갑자기 너무 포근하게 들렸어. 그래서 끊고나서 다짐했지. 동기 남자애들이랑은 역시 거리를 조금 둬야겠다고. 얼결에 전화는 걸었지만 감정적으로 어지러울 때 기대려는게 이 관계에 별로 긍정적이지 않은 것 같아서.


그래서 지금 나는 기분이 굉장히 별로야. 우울하기도 하고 짜증이 나기도 해.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는걸까? 그것도 하필 기분전환하겠다고 나온 오늘같은 날? 화를 낼 곳을 찾을 수 없어서 더 화가났어. 내 기분은 상했는데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니까. 내 화가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고 한다면 너무 장식적인 표현일까?


그냥 재수가 없었던 건데. X, 너는 요새 운이 좀 어때? 나는 재수가 영 좋지를 않아. 새로 산 신발이 이상하게 너무 작아서 발 뒤꿈치에 손가락 한마디만한 물집이 잡힐 때 까지 돌아다니다 확인해보니 한 사이즈 작은거였기도 했고, 빗길에 넘어져 발목이 팅팅부어서 며칠 나다니지 못하기도, 중고거래를 하다가 사기를 당할 뻔 하기도 했어. 그런데 있지, 그때마다 <호구본능>, <클래스는 영원하다>같은 구박과 놀림을 받으면서도 속을 풀려고 동기들을 붙잡고 한참 수다를 떨었는데, 왠지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나는 해소하려고 그런건데 결과적으로는 굳이굳이 그 자리의 관심을 나한테 끌어당기는 느낌이랄까? 게다가 한참을 내 얘기로 조잘대고 있으니 내가 여자라는게 지나치게 부각이 되는 것 같았어. 말 많은거, 말로 스트레스를 푸는거에 호구이미지가 더해져서 전형적인 여자의 캐릭터중 하나로 짠하고 변신한 느낌. 거기에 딸려오는ㅡ 피식하는 웃음이나 머리를 쓰다듬는 손은 아무래도 좀 그렇잖아. 그리고 술기운이 오르니까 꼬리라도 흔들고 싶어지더라고. 이런 생각이 드는 내가 무서워. 당분간 술자리를 멀리하고, 무엇보다 취하지 말아야겠어.


가벼운 빗방울에 밝은 회색 하늘이 좋았는데, 지금보니 비가 꽤 많이 내리네. 이정도라면 신발이 금방 젖을 것 같아. X, 너랑 한가하게 앉아 감자튀김에 크림생맥주를 마시면 좋을텐데. 참 어제는 우연히 티비를 틀었는데 니가 말했던 티베트에서의 7년이 나오더라. 앞부분을 놓치긴했는데 별다른 profoundness를 느끼지는 못했어. 아마 나랑은 코드가 안맞아서 그랬던 걸까? 무엇보다 동양을 알게모르게 우습게 미개하게 그리는거, 혹은 지나치게 신비스럽게 그리는게 거슬렸거든. 그것보다는 오늘 본 개츠비가 더 좋았어. 개츠비는 사실 몇년 전엔가 수업때문에 반만 읽다 덮었던 책인데, 얼마전에 본 영화의 예고편에서 본 등대의 초록 불빛에 꽃혀서 도서관에 앉아 처음부터 다시 읽었어.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영화는 책만큼 좋진 않았지만, 초록 등대와 안개와 개츠비의 뒷모습을 담은 영상은 책을 읽게끔 마음을 움직일 정도로 아련하니, 무어라 쉽게 말하기가 어렵다. 이미지가 상상력을 제한한다는 것 같은 말은 접어두고, 이번 영화는 꼭 챙겨봐바. 영상이 정말 예뻐. 화면구성이나 배경음악이 지나치게 현대적이라 20년대의 분위기를 좀 해치는 것도 같지만, 그래도 정말 예뻐. 영상과 소리가 내가 찾던 감정을 그대로 담고있었던 것 같아서 나는 푹 빠져서 봤어. 닉과 개츠비만큼은 각각의 마음이나 성격, 상황이 더 집중되게끔 만들어지기도 했고. 


<Things went from bad to worse>, 여운이 깊어서 그런지 대사들이 한마디한마디 자꾸 떠오른다. X, 내 잔고와 몸무게와 정신건강은 최악을 향해 치닫고 있어. 사실 이번달에는 수입이 꽤 많았는데 어버이날과 스승의날 선물쇼핑으로 시작해서 내 옷가지와 악세사리를 사제끼다보니 돈을 분수에 맞지 않을만큼 많이 썼어. 간간히 쓴 술값도 꽤 되고. 게다가 글을 한줄도 써내지 못하는 이 상황에서 교수님의 기대는 점점 높아지고 있는게 느껴져. 내가 하고싶은건 결국 과학인데 교수님이 내게 기대하는 것은 문학적인 무언가인것 같아. 회의감을 가지고 면접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은데, 마음을 가다듬는게 왜이렇게 어려운걸까? 심지어 나는 더이상 살고싶지 않다고 또렷히 생각하는데, 그 말의 무게를 느끼다보니 아무에게도 그런 말을 내뱉을 수는 없었어. 그런데 X, 나는 요새 삶에 어떤 의욕도 느끼질 못하겠어. 모든 문제와 중요한 결정은 무기한 미뤄두고만 싶어. 





멀쩡한 듯 지내려니 속이 잠잠해지는 것 같기도 더 문드러지는 것 같기도 해. 확실한 건, 겉은 훨씬 잘 풀린다는거야. 내 이야기, 우울한 이야기 만큼은 넣어두어야 대화가 잘 풀리는 걸 느껴. 나는 이렇듯 겉과 속이 다르게 지내야 남들과 잘 지낼 수 있나봐. 그래서 또 자괴감이 들어. 하긴 불과 몇달 전 연인에게 상처를 이해받으려는 것도 좋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닭대가리처럼 또 깜빡했네. 외로워서 그런가, 어딘가에 기대고 싶은 생각이 이런식으로 나타나나봐. 회의적이거나 비관적으로 말하려는 것은 아니고, 내 마음과 상처는 내가 다스리는게 가장 건강한 건데 왜 자꾸 생각이 엉키고 마음은 제멋대로 움직일까? 아슬아슬, 아슬아슬...


X, 너는 젊음을 박탈당하는 것 같은 기분을 아니? 육체적인 젊음을. 인생 고작 이삼십퍼센트밖에 안 살았는데 이제는 내리막길 밖에 안 남았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의 기분을. 몸에서 여성성은 야금야금 사라져가고 내가 붙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게 다 이제 곧 닥친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불안해. 남자에게는 '중후한' 멋이라는게 있는데 여자에게는 '원숙한' 미가 없는 것 같아. 현실적으로 여자에게 원숙미란 내적인 성숙함에 외적인 젊음을 유지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질 않아. 억울하게도... 그래서 지금 젊음을 조금 더 소비해야될 것 같기도, 조금 더 즉흥적으로 살아야될 것 같기도 해. 시들어버리기 전에. 그런데 책임만 한가득 짊어진 이 시기에 그럴 용기는 나질 않아. 


우울도 가지가지 꼼꼼히 하지? X, 동정할거면 돈으로 부탁할게. 커피나 케이크 기프티콘 같은걸로. 그리고 답장에는 내 자존감을 위해 인간적인 매력에 대한 상세한 기술을 첨부해주기. 눈이 피곤하니 편지는 다소 갑작스럽게 마무리하는걸로 할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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