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폴리스

후기

2013. 6. 30. 00:50




사람들은 영화에 대해 로버트 패틴슨의 재발견, 성공적인 연기 변신이라고 말을 한다. 근데 내가 보기엔 연기를 잘 한 것도 물론 맞지만, 원래 있던 트와일라이트의 뱀파이어 이미지가 이 영화에 잘 맞아든 면이 큰 것 같다. 창백한 얼굴로 반쯤은 인간이 아닌 것 같은 이미지...





나는 에릭 패커는 에릭 패커라고 본다. 자본주의의 상징이 아니라 그냥 자본주의 체제의 정점에 있는, 상위 1%인 사람. 기묘한 것은 에릭 패커는 사람이면서도 육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금융과학'이라는 말이 생기고, 그 안의 파생상품에서 일반인들은 더이상 실물 감각을 느낄 수 없는 것처럼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하면 추상의 영역으로 들어선다고 한다. 에릭 패커는 그래프, 수치, 공식 등으로 이루어진 수학적 질서의 세계에서 성공한 만큼 정신은 그 세계와 일체화 된 것으로, 그리고 동시에 몸은 인간적인 것, 특히 육체적인 것에 대한 감각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이 비인간성은 영화의 처음부터 창백한 얼굴과 무감각한 말투 만으로도 잘 나타난다. 특히 아내와 함께하는 장면들에서 섹스에 대한 집착을 빼면 상대방에 대한 몰이해, 소통불능이 남는다. 몰이해-소통불능-비인간성.


"my prostate's asymmetrical" 극중 패틴슨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전립선이 비대칭이라는 말을 몇번이나 되풀이한다. 같은 대사지만 영화 속에서 시간이 지날 수록 그 말의 느낌이 위태위태해진다. 그리고 이 전립선의 비대칭이 정신과 육체의 불균형의 상징인 만큼 패틴슨이 정신을 놓는(미쳐가는) 정도도 심해진다. 현대 추상 미술의 대표격인 로스코의 그림을 갖기위해 성당을 사겠다고 생떼를 쓰다가, 성적 자극을 끊임 없이 찾다 못해 전기 총을 자신에게 쏴보라고 하다가, 경호원을 죽이고 자신의 손을 쏘기까지. 영화를 줄거리로 보자면 이게 다다. 남주가 환거래 예측을 잘못해 돈을 한꺼번에 날리고 나선 점점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 설정으로 보면 하루동안 리무진을 타고 이발소에 가는 동안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 이야기. 그리고 얼핏보면 월가로 대변되는 자본가들을 비판하는 이야기.





영화가 재미있었던 것은 단순히 월가의 탐욕을 비판하는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고도로 발달된 금융자본주의 안에서 공식과 구조의 복잡함, (서브프라임 사태로 볼 수 있는) 파급효과의 위력, 데이터의 크기, 시장이 움직이는 속도...를 보면 이미 돈과 금융상품은 인간의 손을 벗어났다는 느낌이 든다. 극중 리무진에 탄 사회학자의 말을 들으며 나는 그것들이 그 자체로 인간과 동등한, 혹은 인간에 우선하는 주체가 되었다고 느꼈다. ("Look at those numbers running. Money makes time. It used to be the other way around. Clock time accelerated the rise of capitalism.") 당장 주위의 선물, 옵션 시장만을 봐도 이미 전통적인 실물거래의 시각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진짜로 어떻게 이런 걸 만들어냈는지, 가끔은 고철인 비행기가 나는 것 보다 더 신기하다.) hedge, 자본가들이 위험성과 불확실성을 교환하고 그에따라 수억, 수조, 그야말로 '자본'이라고 부를만한 규모의 돈이 증발하고 피어나는 동안 그만큼의 현물가격 변동폭은 자본과는 무관한 사람들이 떠안게 된다. 시장, 사회, 기술이 움직이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뒤쳐진 사람들. 혹은 그렇게 뒤쳐져서 영원히 뒤로 남은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거리의 시위대, 크림파이 테러리스트, 그리고 마지막 씬의 실직자로 나오는데, 재미있는 것은 로버트 패틴슨만큼 이 사람들도 불균형적으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크림파이테러리스트, 이 남자는 영화관객들을 웃길만큼 우스꽝스럽게 묘사된다. 에릭 패커에게 크림파이를 던지기 위해 오늘 대통령도 마다하고 너한테 달려왔다는 건, 정치보다도 금융자본주의가 문제라는 식으로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곧이어 영국 여왕, 브루네이의 왕, 마이클 조던 등 자기가 '손봐줬다고' 늘어놓는 사람들을 보면 자본가와는 많이 동 떨어져있다. 제대로 된 사고의 결과로 비판의 대상을 찾은게 아니라, 체제 안에서 무기력한 자신의 분노를 비이성적으로 모든 부유한 사람들에게 분출하고 있는 것이다. 부가 곧 악인 것처럼. 부를 타고 났거나, 바늘구멍을 뚫듯 드물게 성공한 것이 부조리는 아닌데도 불구하고.


실직자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외화 baht를 거래했었고, 자신의 일을 좋아했다고 하는 말에서는 분명 체제에 순응하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곧 오락가락하는 말의 많은 부분은 분노를 담고 있다. 신용카드를 쓰는 사람들과 도서관의 뜰에 앉아 행복하게 떠드는 사람들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라고 바득바득. 자신의 박탈감을 신용카드로 표상되는 금융자본주의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이 체제 안에서 뒤쳐지지 않은, 여유있는 사람들에게 증오로 덮어씌우는 것이 맞는 일일까? 점점 세분화되는 정보와 그만큼 빠르게 돌아가는 시장을 쫓아가지 못한 이 남자의 실패가 분명 체제와 무관하지 않긴 하지만 그에 따른 분노와 박탈감은 온통 뒤섞이다 뒤쳐지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로 향한다. 그에게 에릭 파커는 뒤쳐지지 않아 얄미운 사람들의 상징, 그리고 얄미운 체제의 현신이 되다 마침내 자신의 실패 원인이 된다. 


마지막 씬 중에서도 아주 마지막 장면에서: 이 남자는 총을 겨누고 'I want you to heal me, save me. I wanted you to save me.'며 울먹인다. '그래도 날 구해줄 줄 알았는데'에는 '하지만 날 구해주지 않았다'가 생략되어 있다. 암만봐도 여기에 담겨있는건 체제에 대한 옳고 그름 같은 자신의 신념보다, 끝내 구해지지 않은 자신의 안위에 대한 개인적 회한이다. 비이성적 적개심과 귀인의 오류.





실직자 레빈과 패커의 대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딱 이런식이다. "How old are you? I'm interested." "Do you think people like me can't happen?" "How old?" "41. We happen." "Prime number." "But not interesting." 말을 주고 받기는 하지만 평행선처럼 각각 저 할말만 하는. 두 사람은 외부세계가 어떻든 요지부동으로 각각의 우상화를 공고히 하고있다. 에릭 패커는 금융자본을 인간에 우선하는 질서화함으로, 레빈은 자신의 실패와 박탈감을 잘못 귀인함으로. 인간은 소외시킨채 지멋대로 굴러가는 기술과 자본, 그 체제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사람들, 그리고 뒤쳐진 사람들까지 골고루 까내리는 아주 꼼꼼한 사회비판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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