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속의 인도

후기

2012. 11. 25. 22:16




My Red Homeland, 2003

Wax and oil-based paint, steel arm and motor, D1200c

©Anish Kapoor, Courtesy the artist and Lisson Gallery

사진 출처: 아니쉬 카푸어 공식 홈페이지



This is_아니쉬 카푸어 展 @리움 과 장 그르니에의 섬中 일부에 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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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 도대체 어떻게 들여왔을까 싶을만큼 거대한 붉은 왁스 덩어리. 한 사람의 힘으로는 못 밀 것 같은 해머가 그 위를 돌며 (밀가루 반죽 고르게 펴듯이) 매끈한 궤적을 만들고 있는데 창조와 파괴의 공존이라는 메세지까지는 분명했다. 작품 설명은 글자 그대로 모국 인도를 상징하는 것은 아닐 것이랬지만 내게는 인도에 대한 선명한 은유로 보였다.

그 이유인 즉, 해머가 그리는 궤적은 더할나위 없이 매끈했는데 그에 비해 궤적의 외부는 화산 외벽, 혹은 거대한 자갈로 가득한 황무지 같은 거친 질감으로 또 하나의 대립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외부로부터 완벽하게 분리된 매끈한 공간이라는 이미지는 그리스 정신(헬레니즘, 공간에 대한 지배욕구)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비인간적인>사회구조로 오늘날까지 그곳에 존재하고 있는 인도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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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그르니에: "사실 인도는 서로 다른 여러 민족들에게 번갈아가면서 정복당했다. 그런데 그 지배 민족들은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하고나면 브라만 문명에 흡수되고 말았다. 하여간 인도는 아무런 애국도 부르짖어본 일이 없었고 정복을 꿈꾸어 본 일도 없다." "…그러나 자신의 카스트 속에 폐쇄되어 있고 자기 존재의 확장이 아니라 심화를 통해서만 타他에 도달하고자 하는 인도 사람에게는 그 양자가 다같이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인도를 구별짓는 표시는 바로 이것이다. 인도는 비록 정복을 당할지라도 일체의 영향으로부터 항상 벗어났다. 인도는 오직 한 가지 뿐인 야심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자신을 세계로부터 소외시킨다는 야심이다. 제 자신의 꿈 속에 빨려들어간채 인도는 기껏해야 바람에 불리는 파리 새끼의 날갯짓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인간적 삶 따위는 무시하며 요지부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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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 대한 이미지: 힌두교의 고행자. 오직 "삶과 죽음이라는 영원한 쌍의 소멸"에 이르기 위한 삶. 일체의 인간적 사고와 인식 밖에 있는 깨달음과 공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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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d Homeland에서 인도를 떠올리고서 전시를 처음부터 다시 돌아보니, 많은 작품들이 공空이라는 인도적인 개념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작품 앞에 서면 공간 지각력이 상실되는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는데, 공간에 대한 사유, 왜곡과 해체를 통한 새로운 인식이야 말로 인도적인 것이 아닐까? 특히 푸른 반구-Untitled-앞에 서면 시각이라는 감각을 흡수해버리는 것 같은, 아무 것도 없는 공空이면서 또 끝없이 팽창하는 무한성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이 문장... 어둠의 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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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의 감상: 나란한 스테인레스 벽면에 비친 끝없는 관람자의 상을 통해 나르시즘을 자극하는 Vertigo, 같은 네거티브 조각의 형식이지만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외설적인 느낌을 뿜어내는 My body Your body, 친구가 중력의 원리를 설명할 때 보던 그림과 공간감이 같다며 어떤 근원에 대한 메세지가 아닐지...라고 평한 Yellow. 등 다양한 즐거운 정신적인 자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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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그르니에: 인식의 가치. 서양인은(여기서 내가 말하는 서양인이란 그가 살고 있는 장소가 아니라 그가 생각하는 것에 의하여 규정되는 일종의 정신 상태를 뜻한다) 날이 갈수록 오로지 자기의 귀와 눈과 손, 그리고 그의 영향력과 힘을 증대시키는 모든 수단들 즉 도구와 논리밖에 믿지 않는다. 그가 그런 것들에 속을 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라. 그러면 그는 회의주의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를 회의주의에서 구제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밖에 없다. 즉 인간의 정신 속에는 여러 가지 범주들이 존재하는데 그 범주들 때문에 과학은 상대적이 되지만 그래도 그 범주들 덕분에 과학은 확실해진다. 왜냐하면 그 범주들은 모든 정신 속에 다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사실 칸트가 말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ㅡ그러나 우리가 절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칸트는 믿지 않는다)라고 그에게 증명해 보이는 것이 바로 그 방법이다. 인도에서 산카라 역시 여러 가지 범주들을 긍정한다. 그러나 그의 경우 그중 한 가지 범주가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각 세계의 인식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기에 충분한 것이 된다. 우리가 절대를 생각할 때는 그 모든 범주 따위가 우리들에게는 불필요해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인식은 값 있고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 되기에 충분하다. 이 근본적인 대립성은 내 마음을 황홀하게 한다.



인간적인 인식 밖에 있다는 개념들을 이해하고 말하는 것 역시 오감과 정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장 그르니에의 말마따나 이 근본적인 대립성은 내 마음을 황홀하게 한다. 그렇게 잠시 멀미가 날 정도로 황홀했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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