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따라

일기

2013. 7. 28. 00:13




하루종일 닭 한마리 때문에 기분이 오락가락.


최근 엄마의 스트레스 중 하나는 내가 불규칙적으로 먹는데다가 그마저도 대충 빵조가리나 고구마로 부실하게 때운다는 것이다. 냉장고에는 엄마가 기껏 시간을 내서 끓여놓은 백숙이 냄비 고대로 이틀째 들어앉아있었다. 오늘은 귀찮음을 이겨내고 겨우 닭을 먹기로 결심했으나 불 위에 올려놓고 뚜껑을 여니 입맛이 뚝 떨어졌다.


닭은 살아있을 때의 형태가 너무 잘 연상되는 상태로 누워있었다. 심지어 등을 바닥에 대고 누워있는 부자연스러운 자세, 살아있는 닭에게서는 볼 수 없는 이 자세는 닭이 현재 <죽어있는> 상태라는 것을 너무 확실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젓가락으로 닭을 건드리긴 했는데 배를 가르거나 다리를 뜯어낼 엄두는 나지 않았다. 이게 얼마나 앞뒤가 안맞고, 얄팍하고, 가식적인 생각인지를 떠나서 어쨌든 닭을 내 손으로 해치는 느낌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냄비 뚜껑을 덮고 나니 엄마의 시간과 성의를 무시하는 것 같은 죄책감이 들었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를 누구에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표현을 바꿔봐도 같잖고 유난스럽게 들릴 이야기다.


나는 왜 이렇게 피곤한 인간일까. 나는 죽은 것을 보고싶지 않았고, 죽음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고, 죽고 싶지 않았다. 특히 내가 직접적으로 다른 어떤 것을 죽인다는 생각에서는 최대한 벗어나고 싶었다. 한편으로 떠오르는 다른 생각이 있긴 했다. 이 모든 감정은 인간 중심적인 관점을 동식물에게 일방적으로 덧씌우는 멍청한 짓이라는. 동물은 애초에 인간이 느끼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기 때문에 닭을 먹지 않겠다는 결정이나 닭에 대한 나의 동정심은 그 닭의 안위나, 삶의 질에 어떤 영향도 미치질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이미 죽어 요리된 닭은 물론이고 아직 사육되고 있는 닭을 생각해도 마찬가지였다.) 닭이 다가올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그 죽음의 의미에 대해 이해하려 시도하고, 죽음의 과정에 대한 공포에 시달릴 리가 있을까? 닭에게 죽음은 그저 육체가 기능하길 멈추는 것이고, 우연히 태어났듯 우연히 죽는 일일 것이었다. 사람에게 죽음이 영혼과 관련된 것... 의식의 소멸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러니까 닭에 대한 나의 동정심은 닭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의 평화를 위한 것이었다. 동물들의 사육과 도축이 과정이 조금 더 <인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면 나의 감정이 조금 더 정당화 될 수 있을까? 암만 생각해봐도 문장부터가 아이러닉할 뿐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유기농, 친환경 같은 말들이 붙어 조금 더 비싼 소비를 하는 것 밖에 없었다. 


애초에 동물권이나 육식에 대한 원칙적인 생각을 하려던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머리로 무엇을 생각하든, 살아있을 때의 형태 그대로 식탁에 올라오는 동물 반찬을 볼 때의 불편함은 조금도 가시질 않았다. 이상하게도 요새의 나날들은 유독 이런식이다. 어떻게 봐도 이해받기 힘든, 말을 꺼낼 엄두도 나지 않는 유난스러운 감정들의 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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