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단상

일기

2013. 2. 6. 02:46



1. 시를 번역하는 것 만큼 멍청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시를 번역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시에 담긴 단어, 예를 들자면 <창문>이라는 단어는 사전에 풀이되어 있는 <창문>과는 다른 단어인데. ㅊ으로 시작해 ㅇ으로 이어지는 소리의 느낌, 창ㅡ하고 파찰음에서 비음으로 이어지는 청량함, 그리고 입술을 살짝 닫았다 열며 나는 문ㅡ의 소리, 이 차분함을 어떻게 옮길 수 있을까? 생략할 수 있는 문장 구성성분이나 어순이 다른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발음이 주는 느낌과 시상은? 리듬감은?


그러니까 창문은 절대 윈도우가 될 수 없다. 윈도우 역시 창문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윈도우(혹은 fenêtre)를 창문이라고 번역한다. (창문은 얼마간의 빛을 잃고 별수 없이 윈도우가 된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시, 노래가사 같은 것 보다는 동화나 소설이 번역이 덜 까다롭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동화들에 애착이 크게 없다. 그냥 맡은 일이니까, 애초에 큰 울림 없이 읽은 책이니까 꾸역꾸역...




2.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정보공유의 네트워크가 갑절로 커진다는 것에 더해 새로운 영역의 감성을 갖게되는 것이기도 하다. 따지고보면 외국어는 단지 수단이지만 또 동시에 새로운 세상 그 자체이기도 하다. 번역이 어려운 이유는 요기에 있다... 언어는 기호이고, 의미는 보편성을 갖고 있다지만 (도착어에는 없는) 구조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어휘와, (읽는이에 따라 굉장히 주관적인) 함의를 모두 옮겨야 하기때문. 창작과 변형, 단순 전달사이에 모두 발을 걸치고 있는 셈이다. 


그 과정에서 설명을 하고 싶은 욕심 때문인지, 대부분의 역서는 원서보다 길다. 나는 안그러려고 발버둥을 쳐보면 연결이 잘 안되는 것 같은 짱뚱짱뚱한 문장들만 남고, 다듬으려고 보다보면 게슈탈트 붕괴현상이 온다... 아무리봐도 언어는 단순 체계이지만 보편적인 실질에서 도저히 벗겨버릴수는 없는 껍데기다. 번역은 대체 왜이렇게 어려운가 ㅜㅜ




3. 번역물은 역자의 저작물일까?  


계약서나 상품 설명서, 자기소개서 같이 의미전달만이 중요한 밋밋한 문건은 사실 누가 번역하나 결과물이 엇비슷하다. 이렇게 기계적인 작업말고 출판물의 경우에는 역자에게도 저작권이 있는걸까? 역자는 인세를 받는 것이 맞을까 매절로 넘기는 것이 맞을까? 저작권법은 번역물도 하나의 원저작물로 인정해준다. 하지만 그냥 개념적으로 생각해봤을때, 번역물은 역자의 저작물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역자의 예민함이나... 개인적인 성향에 따라서 말도안되게 수고스러운 과정을 거쳐야하지만 역자는 작품에 대한 책임은 지지않는다. 예를 들어 작품의 평이나 판매량 같은 것들. 저작권이라는 말에는 책임과 권리가 동시에 들어있으므로 글쓴이는 저작권을 갖는게 맞는 것 같지만, 역자는 책임은 지지 않으므로 번역이라는 노동에 대한 댓가만 받는게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선뜻 매절이라고 원칙을 세우기는 또 망설여진다. 가끔, 잊었다 싶을때쯤 통장에 들어오는 인세를 보면 꽁돈 생기는 기분이기 때문! 특히 짧은 동화책의 경우엔 매절이나 인세나 처음 출간할 때 받는 돈이 거의 같은데, 2쇄 이상 찍을 가능성을 점치다보면 돈 욕심이 솔솔솔솔.


아 내일 계약서 쓰는데, 어떡하지... 뭘로 한다고 하지...


(덧: 메쇼닉을 읽으며 번역이 역자의 작품이라는 데에는 생각이 닿았지만 인세를 받을 것인지/매절로 팔 것인지 하는 내 결정은 여전히 '어떤 것이 더 이득일까'하는 현실적인 고민에서 자유롭지가 않다. 그리고 사실 더 현실적으로 따지면 나정도의 번역가 '주제에' 스스로의 원칙을 세운다는 것 자체가 현실적이지 않다ㅋ... 20130610 )



4. 이 모든 골치아픔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책이 끝나면 훌리오 코르타자르 단편집을 번역하고 싶다. 이건 생각만 해도 마음이 엄청나게 벅차다. 하지만 나는 스페인어를 못하니까... 요즘 세상에 중역은... 안되겠지?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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