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

일기

2013. 2. 24. 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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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들은 항상 짓궂었다. 모두 미묘하게 다른 방식으로. 그중에서도 Y는 유치하게 놀리는 걸 좋아했다. 후드 티셔츠의 모자에 달린 줄을 당겨서 빼버린다든가 가죽자켓을 입고오면 원시인 족장이라고 놀린다든가...... 당시 나는 그런 장난들에 멍청한 톤으로 느릿하게 '뭐어요??? )!(#*&@^' 하는 놀리기 딱 좋은 신입생이었다. 그런 탓에 내 별명은 한달에 한번 꼴로 바뀌었었다. 내가 밝게 염색을 하고 나타나면 Y는 '심바다 심바 라이온킹ㅋㅋㅋㅋ'하는 식이었고, 그럼 나는 머리속으로 아기사자 심바를 떠올리며 적당히 넘기는 (혹은 스스로를 속이는) 법을 익혔다. 물론 그럴 때 Y가 내 공책에 그려놓은 사자는 야생에 있는 흉포한 다큰 사자였지만.


Y의 장난은 언젠가부터 듣다보니 악의가 섞인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심해졌었다. 종종. '너 우리가 너 좋아해서 그렇게 놀렸던 것 같지? 너 못생겨서 나가라고 그랬던 건데 눈치도 없이 안나가더라ㅋㅋㅋㅋㅋㅋ' 혹은 '아 돼지 지겨워 내 옆에 앉지마ㅋㅋㅋ' 등등. 주위의 동기들이 당황해서 대신 사과하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Y는 마침 마지막 학기인데다 여자친구가 생긴 탓에 자연히 멀어졌다.


가끔은 짜증이 났지만 꽤 오랫동안 나는 Y가 악의는 없다고, 다만 정도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훨씬 뒤에야 깨달았다. Y는 자기의 감정을 표현한 것에 대해 일종의 수치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고. 아끼는 만화를 가득 담아 구운 CD(겉에는 못생긴 글씨로 <오타쿠에의 길>이라고 쓰인)를 준 일, 새벽에 비공개로 길다란 방명록을 남기던 일, 봉사활동을 하러 가자며 새벽같이 일어나 태안행 티켓을 사서 기다리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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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주일에 한 번 사격을 했다. 신입생은 혼자 사격장에 올라갈 수가 없어서 매번 선배들에게 부탁을 해야했는데, 사실 동아리에 사격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 탓에 선배들은 나를 보면 부산스레 책을 꺼내 과제를 시작하거나, 핸드폰을 들고 약속을 만들어 나가곤 했다. 낙담해서 동방에 시무룩하게 앉아있던 어느날 Y가 공강을 맞춰보자며 시간표를 꺼냈고, 매주 목요일 수업이 끝나는 이른 오후에 사격장에 같이 올라가주기로 약속을 했다.


그러니까 Y 덕분에 나는 매주 목요일 낮에 사격을 했다. Y는 총을 쏘기도 쏘지 않기도 했다. 납탄이 표적지 뒤의 금속판에 맞는 소리가 뜸해지면 Y는 한마디씩 했다. 완전 부동자세로 쏘려하지 말고 흔들리는 와중에 중앙에 검은점이 들어오는 리듬을 맞춰서 쏘라든가, 양 쪽 눈을 둘 다 뜨고 있으라든가, 잘 안 잡힐때는 아예 총을 내려놓고 숨을 고르라든가 하는 말들을. 집중을 하다보면 의식하지 못하는 새에 말이 끊기기 마련이었다. 눈이 뻑뻑해 사대 뒷편의 산에 시선을 둘 때 한번씩 돌아본 Y는 가만히 앉아 나를 쳐다보고 있기도, 과제를 하고 있기도, 졸고 있기도 했다. 아주 부드러운 바람을 맞으며 흔들리는 나무들, 움직이는 모자이크 같은 다양한 채도의 초록색 잎들과 Y를 번갈아볼 때면 항상 기분이 좋았다. 밀린 과제나 과소비 습관, 반수를 하라는 엄마의 압박 같은 것이 홀홀 털어지는 유일한 순간이었기 때문에. 


70점대에서 시작한 내 점수는 매주 착착 올라서 해가 바뀔 즘에는 90점대 초반에 닿았고, (엉터리 대회이지만) 대학연합대회에서 매번 상패를 타게 됐다. 그리고 그 즈음 Y가 말을 꺼냈다. 태안에 봉사활동을 하러 가자고. 어학연수를 떠나기 전에 뜻깊은 일을 하고 싶다는 둥의 이야기를 덧붙이면서. 


우리는 정말 정직하게, 행동거지를 둔하게 하는 우주복같은 옷을 입고 맨얼굴에 때를 묻혀가며 하루종일 돌을 닦고 습자지를 수거하다가 막차를 타고 집에 왔다. 그치만 다르게 말하면... 하루종일 파도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대화를 했다. 바다가 있는 마을에 살던 이야기, 그 마을에서는 목욕물에서 항상 짠 냄새가 나서 한달이 지나니 몸에서도 짠 바다냄새가 나기 시작했다는 내 이야기로 시작해서 어렸을 때 동생이 사고가 났던 일, 유행하던 게임팩, 싫어하던 반찬, 북어국을 끓이는 방식, 첫사랑, 혹은 2년간의 짝사랑, 아빠에게 제일 심하게 혼났던 기억까지 쭉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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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돌아온 Y와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 다른 나라로 출국했다. 그리고 엇비슷한 시기에 귀국했다. 태안에서 사적인 이야기를 나눴던 일은 어떤 계기가 되었는지 우리는 종종 길다란 이메일을 쓰고, 노래를 나눠듣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서울에서 본 Y는 태안에 다시 가자는 소리를 했다. 얼마나 깨끗해졌는지 보러가자고, 차를 가지고 집 앞으로 오겠다고. 아주 잠깐 다른 마음이 있나 의심했지만 1년만인데도 만나자마자 여전한 개드립과 짓궂은 장난('아 아직도 못생겼어ㅋㅋㅋㅋ')에 곧바로 안심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한번 버스창 너머로 본 길인데 큰 길에서 만리포 해수욕장으로 접어드는 길은 눈에 익었다. 쌩뚱맞게 서있는 우리 학교의 수련원, 버스정류장을 찾는다고 무작정 걸었던 인적드문 도로, 바람을 버티기엔 좀 얇아보이는 나무들과 촌스러운 간판의 음식점들. 나른하기도 아득하기도한 그 기분이 꼭 사격장에서 뒷산을 볼 때와 같았다. 


태안, 습자지가 나뒹굴고 공격적인 문구들의 현수막이 빼곡했던 만리포와 천리포는 모두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겨울 바다의 사진을 몇 장 찍고 물에 손 한번 담궈보고, 냄새도 한번 맡아보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쓰레기와 현수막을 빼고는 모두 그대로였다. 그 때와는 달리 일거리가 없으니 시간이 잘 가질 않았다. 근처 식당에서 밥을 시키며 1년 전, 돌을 닦던 때의 팔아픔과 그 때와 꼭 같으면서도 다른 풍경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니 뭔가 좀 묘하다고 생각되기도 했다. 다른 선후배들도 세네시간씩 차를 타고 둘이 내려와 함께했던 추억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밥을 먹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계속 하기엔 몸부림치는 문어가 들어있는 탕의 모습이 너무 자극적이었다. 그 모습에 질색했다가 곧 맛있다고 잘만 먹는 내가 웃겼고, 처음 먹는 탕ㅡ 방금 전까지 뚜껑을 밀어내며 괴로워하던 문어가 들어있는 탕은 서글프게도 빛깔이 예뻤다. 밖에 걸려있는 노을만큼 예쁜 분홍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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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눈물을 뺄 만큼 Y가 짓궂어진 것은 직후 봄학기부터였다. 깜깜한 고속도로를 올라오던중에 나는 왠지 Y가 내 손을 잡으려고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순간이 있었는데, 그야말로 한 '순간'의 느낌인데다 Y가 특별한 말을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Y는 운전중이었기 때문에 나는 나만의 엄청난 착각이라고 생각하고선 괜히 민망해 시덥잖은 얘기에도 크게크게 웃고 넘겼었다. 적어도 나에게, 돌아오던 그 차안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과 과장된 농담과 상기된 두 얼굴이 있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어렸고, 눈치가 없이 단순했고, 그래서 혼란스러웠다. 


골치가 아파 돌아온 후에는 가끔 그러듯 외출을 끊고 방구석에서 책만 읽다 학교에 나갔는데ㅡ Y는 몸부림치다 익어버린 문어탕만큼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한밤중 잠에서 깼을 때 문득 느끼는 공포감, 나는 누굴까하는 현실유리감 같은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던 Y는 어딘가 날카로운 기색으로 짓궂게 놀리기만 하는 선배가 되어갔다. 천천히. 


게다가 하필 Y는 내가 싫어하는 후배를 사귀다 다음 해 조용히 졸업했고, 우리는 자연히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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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Y를 못본지는 (혹은 선배들의 결혼식에서 마주쳐도 데면데면 인사만 건네기는) 4년 쯤 되던 참이었다. 나는 어수선한 졸업식을 끝내고 K동 앞에서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체국 쪽에서 걸어나온 Y는 태연하게도 졸업축하해, 한마디와 선물 꾸러미만 건네고 사람들 사이로 유유히 사라졌다. 내가 졸업을 하는지 어쩌는지는 모르고 여자친구 졸업식에 왔다가, 우연히 마주친 내게 마침 손에 들고있던 무난한 선물(비누세트)을 건넨 것일 수도 있을까?


나는 더이상 어리지 않고, 눈꼽만큼이나마 눈치도 늘어 남자가 내게 보이는 호감같은 건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한 때 정말 친한 사람이었던 Y와 어느 순간 변해버린 Y도 이제는 이해하지만 기별없이 지내던 중에 홍두깨같이 나타나 선물만 전하고 사라지는 Y는 아직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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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실 이런들 저런들 상관없는 이야기. 굳이 뭔가를 생각해내려면 가까운 미래에 있을 것 같은 Y의 결혼식에 선물을 할지 축의금을 낼지, 여자친구 쪽에는 어떻게 해야할지나 미리 고민할 일이다. 


스물여섯, 졸업. 나이가 들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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