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다만 메모

일기

2012. 11. 11. 23:40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화면이 양쪽으로 분할되서 한쪽은 물이 흐르고, 한쪽은 도시의 사람들이 걷는 모습이 나오던 영상이었다. 소리없는 그 영상은 무채색의 색감으로 묘하게 연결된 채로 대립되는 개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낮은 위치의 카메라가 사람들의 발만을 비추는데다 특이하게도 느릿하게 뒤로 감은 영상인듯 발들이 천천히 거꾸로 걷는데 반해 물은 크게는 한쪽으로 흐르고 있지만 빠르기나 방향을 조작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클로징멘트는 water flows, human walks. 자연은 그렇듯 인간의 인식과는 별개로 처음부터 끝까지 존재한다는 것일까... 사람들이 뒤로 걷게끔 천천히 되감은 이미지는 뒷걸음질, 과거, 회귀, 인위성artificiality 같은 단어들을 뱉는 것 같았다. 멍하니 보다보다보니 니체의 영원회귀사상과 파르메니데스의 대립쌍이 떠올랐다.


소설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니체의 영원한 재귀의 생각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면서 (그에 반해) 지속되지 않는 것은 하찮은 것, 아무 무게도 없는 것,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 없는 것, 그래서 무상한 것, 심판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한번 있는 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결국 삶의 모든 것은 냉소적으로 허용되어있다라는 서술. 그리고 이어지는 온 세계는 대립의 쌍으로 양분되어 있다는 (고대 철학자의) 주장. 경솔한 말일 수 있지만 나는 많은 예술 작품들이 결국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고 느꼈다. 큰 원형적 개념들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는가하는 형식의 문제는 아닐지.


얄궂게도 쿤데라는 파르메니데스의 가벼움과 무거움의 대립에 대해 확실한 것은 오직 그 대립이 다른 모든 대립들 중에서도 가장 신비스럽고 가장 타의적인 점이라고 했다. 다른 모든 작가들 역시 항상 중요한 것은 각각의 유의미함이나 가치를 재보는 일이 아니라고 한다. 그 조합이 자체로 그렇게 미묘하게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나는 그 대립쌍때문에 이렇게나 괴로운데 그렇게 무책임한 말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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