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일기

2012. 11. 28. 00:27

This is_5년동안 알고 지냈지만 한번도 친했다고 하긴 어려운 L과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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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득한 옛날 봄. 가족들이랑 외식중이었는데 뜬금없는 전화가 왔다. 오지랖 넓은 동기가 술을 마시다 전화를 해선 여기 있는 L이 널 좋아한다고 했다며 낄낄거리다가 끊었다. 누구지, 아 그 까만 신입생? 원래 말을 해본 적도 없었지만 그 뒤로는 더욱 말을 걸기가 어려웠다. 그 후로도 몇번의 술자리에서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L은 막상 내게 호감 비슷한 것이라도 표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 즈음의 L은 Q동 4층에서 회색 추리닝과 흰색 반팔을 입고 열심히 춤을 추던 길쭉한 신입생, 지나가면 굳이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는 깍듯한 신입생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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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다시 기억나는건 2년 후. 당시 L은 의류학과인지 모델학과인지를 다니던 키가 큰 여자애를 사겼었는데, 나는 둘을 불러 술을 사준적이 서너번 있었다. 점잖은 둘을 앉혀놓고 여자친구가 예쁘다느니 잘어울린다느니 선배인 내가 호들갑을 떨며 술을 마셨다. 가물가물하지만 어쨌든 표면적으로는 좀 가까워졌었는지 우리는 공강시간에 잠시 만나 음료수를 먹기도, 내가 싸온 도시락을 매점에서 까먹기도, 수업이 끝나고 연습실에 가기 전 잠깐 같이 벤치에 앉아있기도 했다. K모교수님의 이상한 성격과 히스테리, 등교길에 급히 택시를 탔는데도 엉뚱하게 도는 바람에 지각한 이야기, 당시 내가 싸가지고 다니던 기상천외한 도시락의 품평... 우리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일상적이고 피상적인 주제를 벗어나질 않았다.  


L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쨌든 사람을 대하고보면 이 사람의 코드가 어떤지, 경솔한 면을 자주 보이는지, 속 깊은 면이 있는지 등등 어느정도는 파악이 되기 마련인데 L은 잡히는게 거의 없었다. 완벽하게 무미건조한 느낌? 그렇다고 텅 빈 느낌은 아니고 뭔가 있는데 그 속을 알 수가 없는 느낌. 이전의 회장들처럼 (그들 역시 의무감에서였겠지만) 들뜬 느낌으로 말을 많이하거나 분위기를 띄우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또 내성적이거나 소심한 기운은 전혀 없었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사무적이고 단호한 태도로 까마득한 선배들의 말까지도 빠릿빠릿 정리해치웠고, 여럿모여 노닥거리는 자리에서는 적당히 재치있는 말들로 사람들의 대화를 거드는 편이었다. L은 또 표정이 없는 편인데 반해 춤은 참 여러 장르를 곧잘 따라했다. 


나는 L을 대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L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종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L이 동아리를 맡던 해에 나는 혼자 신입생들을 데리고 공연을 했는데 결과가 시원찮을 뿐 아니라 이런저런 잡음들을 만들었었고, (지금도 그렇지만) 프리스타일에 대한 부담감으로 어느정도 위축되어 있기도 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설상가상으로 그 다음해에도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동아리에 발을 끊을 뻔 했고, 지금이야 오해를 풀고 지내게 됐지만 (생각해보니 당시 L이 '조금만 기다려봐요ㅡ'같은 메세지를 남기기도 했었다) 그 후론 동아리내에서 기를 못펴고 겉돌게 되었다고 표현하면 딱 맞을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그렇게 떳떳한 선배가 아니었다. 그리고 L은 그 해 여름인가, 내게는 따로 연락없이 군대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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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봄, L이 전역하고 난 후 우리는 오다가다 마주치면 짤막짤막하게 인사와 근황정도만 나누는 정도로, 따로 연락을 하던 사이는 아니었다. 동아리 박람회를 하던 체육관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동아리의 테이블에 있다가 마주친 적이 있는데, 우리는 어 안녕! 잘지내? 네 누나는요 학교 다녀요? 응 뭐 마지막 학기야. 아... 그때 만나던 애랑은? 헤어졌죠. 응... 뭐 나도 헤어졌어. 같은 대화를 나눴다. 나는 어색함을 견디다 못해 마침 지나가던 친구를 붙잡고 아 얘도 너네과야, 니 선배겠다. 학교 같이 다닐테니까 인사나 해.하고 몇마디 더 이어가다가 얼른 체육관을 나왔다. L은 웃는 것도 곤란해 하는 것도 아닌, 내가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대화 중 몇번인가 눈을 마주치다가, 춤을 추다가, 그랬던 것 같다.


그 뒤에 L을 다시 만난건 뜬금없는 OB술자리였다. 유독 이 동아리에서 내성적인 이미지로 굳어져 기를 잘 못펴던 나는 22시쯤인가 일어날 생각이었는데, L이 곧 온다는 소리를 듣고 왜인지 그냥 앉아있기로 했다. 만취한 대선배가 오락가락 모노드라마를 펼치는 것도, 채 한살 많지도 않은 선배가 '오빠가 오빠가' 하며 술을 권하는 것도, 그나마 친한 친구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며 의미없고 가벼운 말들만 늘어놓는 것도 지겨운 참이었는데, L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나니 그 모든게 참을만 했다. 참을만 했다기보다는 신경쓰이질 않았다. 딱히 평소에 L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L이 좋아지나,라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냥 마음이 좀 들떴다.


나는 L과 통화하던 친구의 전화를 굳이 뺏어 마중을 나왔는데, 역시 동교동 밤골목에서 마주친 L과 나는 어색하기만 했다. 어 안녕 진짜 오랜만. 안녕하세요. 왜이렇게 늦게왔어. 알바하다가요. 아 인형탈, 안힘들어?. 엄청 배고파요. 안주는 없고 선배들 엄청 취했어. 그래요?


L이 오고 만취한 선배들이 빠지고 자리를 옮겼지만 여전히 사람은 꽤 많았다. 열 명 남짓. 2차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L과 널찍히 떨어져 앉아 힘겹게 언니들 앞에서 재롱을 떨며 술을 마셨다. 재미도 없고, 내밀한 이야기가 오가는 것도 아니고, 눈은 뻐근해오고. 단체 사진을 찍어 페이스북에 올린 것 말고는 기억도 안나는 술자리. 그 시간들을 참아내고 나오니 시간은 새벽 두시, 남은 사람은 딱 넷이었다. 나, L, 친구, 선배. 어쩐일인지 평소 술을 잘 마시지 않던 친구가 한 잔만 더 하자고 잡아끄는 바람에 또 맥주를 하러 자리를 옮겼는데ㅡ 사실 내가 굳이 3차까지 따라간건 친한 친구의 부탁때문이 아니라 ("나 두달 내내 주말도 없이 야근만 하다 처음으로 친구들이랑 술 마시니까 너무 좋아서 그래. 맥주 딱 한잔만 하고 가라. 응?") L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그래요 누나 좀만 더 있다가요. 왜인지 아직도 눈에 선한 밝은 홍대 술집 골목, 딱히 뭐라하기 힘든 표정의 얼굴, 건조한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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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호프집에서 소맥을 마시는데, 두시간 가량 친구는 갓 취업해 힘든 직장이야기, 선배는 동아리 후배 짝사랑으로 앓는 소리를 했던 것 같다. 그 사이 언젠가 잠깐 나는 L에게 "내가 그때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술 마시자고 하고 그랬던 건데, 기억나? 어쩜 이렇게 안 친해졌지?"라고 말을 꺼냈던 것 같다. L은 친해지기 어렵다는 말을 늘상 듣는다는 말에 이렇게 덧붙였다. "누나가 도망칠 구멍을 너무 많이 만들었었죠. 술자리에 항상 제 여자친구, 누나 다른 동아리 친구, 누나, 저. 맨날 그렇게."


여전히 그냥 무미건조하다고 말하기엔 무언가가 분명 더해진 묘한 표정. L이 어려운건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간간히 정곡을 찌르는 말. 당시 나는 딱히 의식적으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라거나 부담을 덜기 위해, 같은 이유로 꼭 한두명을 더 붙여 자리를 만든건 아니었지만 돌이켜보니 도망칠 구멍을 만들었다는 표현이 꼭 맞았다. L은 그걸 다 읽고 있었구나.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불안감.


아닌게 아니라 그 말을 들으니 바로 생각나는 장면이 있었는데, 예전 언젠가, 해가 기울어질때 쯤 농구코트 옆 스탠드에 앉아있다 내가  뜬금없이 L에게 쓰던 핸드크림을 줬던 적이 있다. 그때 처음 본 L의 손은 말도안되게 거칠었는데, 나는 보자마자 놀라서 너 손이 왜그래? 핸드크림 바를래? 라고 했고, L은, 네. 저 손이 좀. 야 너 이거 걍 다 써. 얼마 남지도 않은 것 같은데요. 이거 저한테 버리시는거 아니에요?. 나는 L의 손을 보고 핸드크림을 꺼내서 건내기까지 '내가 오바했나?' '마음이 있는걸로 생각하려나?' '아 얘 여자친구까지 불러다 고기 먹였으니 그렇진 않겠지' 같은 갖가지 생각을 했던게 기억이 났는데, 그 때 L이 쳐다보던 표정도 같이 떠올랐고, 당시 순간순간의 생각을 L이 읽고 있었던 것만 같은, 그리고 지금 이 술자리에서 그 장면을 떠올리는 것까지 들여다보는 것 같은 기분에 어려웠다. L의 눈빛이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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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됐건 그 이야기는 (그저 내 머리속에 깊게 남았을 뿐) 길게 한 게 아니고, 우리는 적당히 진지한 이야기들을 하다가 새벽 네시가 되서야 가게를 나왔다. 어느순간부터 몰려오는 피로감을 주체하지 못하는게 눈에 보이던 친구는 큰길로 나오자 인사만 던지고 급히 대로를 건너 택시를 잡아탔다. 어 나는... 여기서 택시타면 돼. 너는 반대방향이지? 먼저 가. 아니에요 택시 타는거 보고 갈게요. 괜찮은데. 가까워서 잘 안잡힐걸요 기다릴게요.


L말처럼 대부분의 택시가 서울 외곽만 간다며 승차거부를 하는바람에 대로변에서지만 L과 몇마디 더 나누게 됐다. 서로 바뀐 핸드폰번호를 교환하고, 꽤 걸렸지만 L이 잡아준 택시에 탔다. '서울34사1042'. 새벽에 택시를 타면 번호 찍어주는게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왠지 먹먹한 마음에 문자만 한참 쳐다보다 집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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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는 갑자기 생긴 남자친구에 더해 자소서, 인적성, 면접, 자괴감의 방학, 다시 자소서...를 반복하느라 L을 생각해 본적이 없다. 그리고 며칠 전 모두가 모이는 공연에 갔는데, 공연장에 들어서자마자 L이 보였다. 홀쭉하니 큰 키에 깔끔한 옷차림, 밋밋한 표정. 한참 어린 후배들과도 어색하게 인사를 다 했는데 왠지 마음이 복잡해서 L에게는 말을 걸 수가 없었다. 나름 선배라고 대접을 받아 앞자리에 앉았는데 첫 곡부터 L이 나왔다. 멋있어서, 소리도 못지르고 그냥 멍하니 쳐다봤다. L의 주장르가 어반으로 기울고 나서부턴 눈 앞에서 본 적이 없었는데,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을만큼 멋있었다. 혹시나 또 내 표정이 너무 티가 날까봐, 눈이 마주칠까봐 무서워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다른 선후배들을 보며 흘끔흘끔 L을 봤다. 시간이 가는게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L은 몇번 더 무대에 섰고, 자기 곡이 다 끝나자 무대 바로 앞, 그러니까 내 앞, 재학생들 사이에 앉았다. 나는 L의 뒷모습을 보면서 딱히 무슨 상상을 할 여유도 없이 그냥 설렜던 것 같다. 내가 왜이러는지 스스로도 혼란스러워서 공연내내, 쉬는 시간에도, 다 끝나고 사진 찍는 시간에도, 자리를 옮겨 뒷풀이를 하는 시간에도, L에게 말을 걸지를 못했다.


졸업한 선배들과 먼저 가있던 뒷풀이 장소, 한참 술을 마시다 보니 서너 테이블뒤에 L이 들어와 앉았다. 자꾸 L이 눈에 밟혀서 일부러 마주앉은 선배들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재롱을 떨며 술을 마셨다. 시간이 지나고 자리를 섞기 시작하니 친하지 않은 사람들과 앉게됐고 어색한만큼 서로 농담만 건네며 술을 마셨다. 빈 옆자리에 L이 앉았다. 당황해서 화장실 앞으로 자리를 피했다.


화장실 앞엔 우연인지 하필 유독 호들갑을 잘 떠는 선후배들이 모여있었다. 취했는지 나를 보자마자 뜬금없이 자신의 동아리내 복잡한 연애사를 털어놓는 후배, 오늘은 제대로 마시고 가라며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취한 선배를 정신없이 상대하다 반갑게도 친한 후배를 발견해 말을 걸어 둘을 떼어놓으려는데, L이 그 후배 옆으로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당황한 나는 악수를 하며 한꺼번에 '어 야 너 오늘 인사도 안하고. 잘 지냈어? 오늘 엄청 멋있더라'를 쏟아냈다. L은: '네 저 잘지내죠 동아리 안에서 여자친구 만나요.' '어 진짜??????' '네 모르셨어요? 아 하긴 누나는 다른 동아리만 열심이시니까. 안그래도 누나가 소개해준 그 선배랑 얼마전에 답사를 같이 갔었는데 누나...'



 

L은 표정이 참 밝았다. 나는 그날 저녁 내내 손에 가득찬 물컵을 들고 찰랑찰랑 흔드는 것 같이 마음이 복잡했는데 L의 밝은 표정과 여자친구라는 단어에 그 물을 다 쏟아버린 것 같았다. 한나절이나마 그렇게 마음 졸인 내가 참 한심해서, 그리고 그게 이번에도 L에게 고스란히 읽혔을까봐 무서워서, 말을 끊고 '어 응 나 잠깐 화장실 좀!'하고 들어갔다 L을 피해 자리로 돌아와 짐을 챙겨 술집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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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공모전 소개팅 인터뷰... 두시간이나 투자해 이렇게 써제꼈으니 이제 마음 잡고 다시 할 일을 해야겠다. 아 챙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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