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집에

일기

2012. 12. 29. 22:16

   



생일 선물로:

스티븐 핑커의 책 한권, 뽀송뽀송한 요가매트, 차를 내릴 때 쓰는 모래시계와 다양한 향의 차들, 표지가 독특한 수첩, 조말론의 향수, 그리고 그레이구스 보드카 한 병을 받았다.


연말 축제분위기에 취해 한껏 정신없이 쏘아다니다가 막상 생일엔 홀로 조용히 집에.


아침 일찍 눈을 뜬 김에 물을 끓이고 차를 내렸다. 모래시계를 뒤집어두고 꽃 향기를 맡으며 예전의 일기장을 꺼내 읽었다. 내가 썼다고 믿기지 않을만큼 낯선 글씨체들은 그 자체로 강박적이기도, 정갈하기도, 경박하기도 했다. 20대 초반의 기록은 글자의 모양에서부터 나의 변화를 담고 있었다. 부자연스럽게 깔끔한 글씨, 균형이 잡히지 않은 못생긴 글씨, 어딘가 밝은 느낌이 더해진 흘림체 글씨... 망가진 생활에서 벗어나겠다는 다짐도, 손대면 절망이 묻을 것 같은 비관도, 짧게 스쳐지나간 사람들에 대한 기록과 내가 외향적인 사람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모두 고스란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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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하게 하는 건 감성이지만 사랑을 지속시키는 것은 다분히 이성적인 것. 소유욕, 질투를 잘 조절하기. 2007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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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것들: 모두가 외로움이란 만성질환을 갖고 산다는 것. 애초에 외로움이 있었기 때문에 관계도 생긴다는 것. 누군가의 부재를 느끼는 것이 남아있는 관계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는 것. 그리고... 친구가 되고 사랑을 해도 외로움이 끝나지는 않는다는 것. 2007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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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삼인조 아웃사이더들 (바람둥이 마약중독자)조차도 사회의 여백에서 잘 자리잡고 있다.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2008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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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과 대화과 노동인 현실. 그런 와중에 사람들은 왜 내게 의견을 갖기를, 뭐든 표현하기를 요구하는 건지. 어렴풋한 관계들. 벽에 기대어서는 버릇. 2008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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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일탈. 구두와 두통. 대화와 불화. 카페인과 카카오. 다치는 것과 닫히는 것. 흡연과 인연. 흉터와 필터. 밀담과 가담加擔과 가담街談. 2008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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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나서, 이불과 베개를 던지는 대신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7번 3악장을 쳤다. 있는 힘껏 처음부터 끝까지 포르테시모로 꽝꽝. 나는 조금 고상하고도 가식적인 인간이 된 것 같다. 20090522




Newyear'sresolution:

일기장 속, 매년 이맘 즈음에는 새해 목표를 고민한 흔적이 있었다. 3년 전에는 단기 목표를 세우고 지키기, 규칙적으로 먹고 운동하기, 수업 빠지지 않기같은 다짐을 했었고, 2년 전에는 사람들의 비판과 충고를 편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기, 쉽게쉽게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지 않기 같은 목표를 세웠었다.


내년에는, 진로를 정하고, 술을 마셔도 정신을 놓지 않고, 생각을 더욱 구체적으로 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어른. 사적인 공간으로 들어오려는 어른은 항상 어렵다. 나는 길이가 얼마인지도 모르는 막대기 하나를 들고 상대방을 가늠하는데, 어른은 엄청나게 정밀한 줄자로 나를 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상대방이 나를 어떤 기준으로 어떤 면을 평가할지 전혀 감이 잡히질 않는다. 나는 아직 살지 못한 5년, 10년을 먼저 갖고있는 사람의 시선과 정신은 어떤 것일까? 나는 상대방의 말 속에서 빛나는 작은 호감의 표시들, 혹은 평가의 기색을 볼 때마다 마음이 한없이 흔들린다. 


나보다 여섯살이 많은, 나는 겪어보지 못한 사회에서 5년을 지낸 사람이 마주앉아 눈을 빛내며 웃는다. 나는 이 사람이 내게서 찾는 매력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감성의 영역이 단순한 사람과는 만나지 않겠다고 생각했던게 엊그제인데, 왜 나는 이사람을 만나고 있는걸까? 자신의 일을 좋다고 재미있다고 말하는 것, 웃음기 있는 선한 인상, 높은 구두를 신어도 나보다 한참 큰 키와 덩치에 마음이 움직인다. 내가 적당히 밀어낼 때에도 매번 다시 봐요, 혹은 이번 일요일에는 그럼 그 영화 같이 보러 가요, 같은 말로 확실히 다가선다. 맑은 표정. 나는 아 네,라고 대답하다가 그래요,를 거쳐 좋아요,라고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취향과 코드가 맞고 어떤 면에서든 심미안이 발달한 사람을 만나야겠다라고 생각했는데 이 사람은 기름진 전을 좋아하고 밥을 질게 먹는데다가 옷차림에 통 관심이 없다. 심지어 방학에 온전히 빈둥거려본적 한번 없을만큼 부지런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것 같다. 지나치게 구김살이 없는데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단순하고도 긍정적인 에너지가 베어나오길래 나랑은 전혀 안 맞겠다라고 생각 했는데, 나는 이 사람의 분위기에 묻어가고 싶은건지 집에와서 팩토링, PF, 운영리스 같은 단어들을 찾아보고 있다. 자신있는 표정과 간결한 어투로 자신의 일에 대해 말하던 모습을 떠올리면서.


그치만 또... 너는 잘 될 사람이야, 혹은 너는 참 솔직한 것 같아, 같은 말에서 자꾸 나는 길을 잃는다. 마치 천성인양 몸에 밝고 소탈하고 똑똑한 캐릭터(혹은 가식)를 똘똘 두른 나, 하지만 사실은 방향도 못 잡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게으른 고민만 하고 있는 내게서 이 사람은 도대체 뭘 보는걸까?




결국엔:

머리가 아파서, 발 끝이 차가워져서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울세제를 풀고 매일 안고 자는 인형을 조물조물 빨았다. 망에 두번 조심조심 감싸서 탈수기에 넣고, 큰 유리컵 가득 오렌지 주스와 보드카를 따랐다. 어쩜, 보드카를 따르며 내년에는 술을 좀 줄여야지,하고 생각하는 여자다 나는... 혼자 있으면서도 부끄러워서 '내년에는'에 무게를 두다가 곧 술을 줄인다는 다짐을 '흐트러지지 않을만큼만 마시는'이라고 워딩을 바꿔본다. 


늦었지만 새 요가매트를 깔고 스트레칭도, 운동도 하고ㅡ 책도 읽고, 새 수첩에 책 이름과 날짜 정도는 적어봐야지.






곱씹어보건대ㅡ 아무래도 어른이 되어 연애를 한다는 것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차근차근, 자기 감정에 취하거나 휩쓸려서 두는 수 같은 것은 없는 것인가보다. 약속은 미루어두고 나는 내 입장과 중심을 조금 생각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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